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과거 역사에서 일본은 가해자였고 우리는 피해자였다. 이런 경험을 갖고 있는 우리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일본보다 약자에 대한 동정심과 인권 문제나 평화 같은 문제에 더욱 민감할 가능성이 높다. 더구나 우리는 일본에 대해서는 당연히 피해의식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이런 현상은 우리나라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오랜 기간 터키의 지배를 받았던 그리스의 경우도 터키와 관련된 문제만 나오면 유독 민감하게 반응한다. 이런 상황을 보면 과거 가해국은 피해국에 모든 면에서 아주 조심해야 함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지금 일본은 우리를 자극하지 못해 안달이 난 것 같다. 과거사에 대해 반성하지 않고 있는 것도 괘씸한데 여기다가 경제 보복까지 하고 있으니 우리 모두가 분개하는 것은 당연하다.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점은 지금 우리가 일본의 조치에 분개하는 것이 단순하게 경제 보복 조치에 대한 억울함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렇기에 일본은 대한민국 국민의 분노에 찬 대응을 경제 보복에 대한 반응 정도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일본의 한 의류 기업 CFO가 “(불매운동에 따른 영향이) 장기간 이어지진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는데, 이런 걸 보면 일본은, 지금 대한민국 국민이 분개하는 근본적 이유에 대한 성찰이 아주 부족한 것 같다. 이럴수록 우리 국민은 더욱 분개할 수밖에 없다. 우리 국민의 이런 분노는 일본에 대한 외교적 대응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여론이 지지하지 않는 정책이 성공할 수 없는 이치와 똑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정책 입안자나 혹은 정책 추진 중심에 서 있는 사람들이 국민과 똑같이 흥분하라는 의미는 아니다. 정책을 추진하는 사람이나 정책을 만들어야 하는 사람들 역시 개인적으로는 분노할 수 있지만 이를 적나라하게 표현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이들이 분노를 노골적으로 표현할 경우 상대는 오히려 이것을 빌미로 역공을 펼 수도 있고, ‘여과 없는 감정의 표현’을 통해 우리의 전략을 본의 아니게 노출시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공직자들, 특히 청와대에 있는 고위직 공무원들은 자신들의 ‘개인적’ 의견을 개진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은 것이다.
특히 대통령을 보좌하는 이들은 ‘입’이 없어야 한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신중해야 한다. 본인들이 오해를 불러올 수 있는 처신을 할 경우 이는 국익을 해칠 수 있는 상황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SNS를 활용해서 자신의 입장이나 생각을 표출하는 것도 자제해야 한다. 우리는 그동안 SNS에 글을 잘못 올렸다가 낭패를 당한 정치인들을 수없이 봐왔다. SNS는 전파력이 뛰어난 매체이긴 하지만, 그 전파력 때문에 오히려 낭패를 맛보게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최대한 신중해야 하는 청와대 비서진은 SNS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것을 삼가는 것이 좋다. 만일 그래도 본인의 생각을 그대로 말하고 싶다면, 그때는 미련 없이 청와대를 떠나 내년 총선에 출마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고위직 공무원과는 다르게, 정치인들은 여론에 민감하게 반응해야 하기 때문에, 얼마든지 자신들의 분노도 표출할 수 있다.
지금 우리는 매우 위중한 상황에 직면해 있다. 이런 위중한 상황이 얼마나 지속되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삶의 많은 부분이 달라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이런 상황이기에, 정부는 여론을 등에 업고 냉정하고 이성적인 대응을 해서 상대의 급소를 공략해야 한다. 이제 정부가 과연 그런 대응책을 펼 것인지를 지켜봐야 하는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