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3일 내한 독주회…"연주자·교수·심사위원 각각 균형 이루고파"
하이든의 피아노 소나타로 시작한 '유머레스크(Humoresques)' 여정은 슈만의 다비드동맹 무곡, 오이제비우스 등에서 날개를 펼쳤다. 쇼팽 마주르카 5곡, 쇼팽 스케르초 4번, 파데레프스키의 '유머레스크'는 신선했다. 쉴 틈 없이 이어지는 마주르카 5곡으로 객석의 몰입도는 고조됐다.
독주회를 위해 내한한 케빈 케너를 서울 종로구 인사동 오라카이 스위츠 호텔에서 만났다. 10일 서울 신영체임버홀, 11일 예술의전당 IBK챔버홀, 12일 광주 유스퀘어문화관 금호아트홀 공연과 12일 마스터클래스 일정 등으로 그의 일정표는 빡빡하게 채워져 있었다.
"한국에 1년 만에 다시 오게 돼서 기쁩니다. 이번에도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젊은 피아니스트들을 만날 기회가 있어서 기대됩니다. 음악을 만드는 것만큼이나 후배를 양성하고 실력 있는 피아니스트를 만나 지도하는 것은 보람찬 일입니다."
케빈 케너의 이름 앞에는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의 '영혼의 동반자', 피아니스트 조성진의 '멘토'라는 수식어가 달린다. 1990년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 우승(1위 없는 2위)과 폴로네이즈상을 수상하고 같은 해 차이콥스키 국제 콩쿠르에서 3위를 차지한 이력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현재까지 쇼팽과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동시 입상한 유일한 미국인 피아니스트다.
대단히 진지하고 학구적인 인물로 알려진 케빈 케너. 하지만 피아노를 선택할 때 특별한 기준은 없었다. 그는 "매번 연주할 때마다 다른 악기를 만나게 된다"라며 "새로운 악기를 만나는 건 연주자로서 도전이자 가회다"라고 했다.
그는 프로그램 노트를 직접 작성하곤 한다. 리사이틀 1부는 하이든과 슈만으로, 2부는 쇼팽과 파데레프스키로 구성했다. 두 번째 독주회 주제 '유머레스크'를 통해 하이든, 쇼팽, 슈만, 파데레프스키의 음악 속 유머를 탐독한다. 때로는 기발함과 놀라움, 익살과 패러디 형태로, 때로는 위대함과 고통을 담은 웃음이란 더 복잡한 형태로 유머의 본질을 보여준다.
"독서를 좋아하고 음악 관련 연구를 좋아해요. 독일 철학가이자 소설가인 장 파울 프리드리히 리히터가 유머를 주제로 쓴 에세이를 읽고 감명받았어요. 유머란 인생에서 없으면 안 될 중요한 감정이에요.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도 바꿀 수 있고요. 아스피린보다 더 중요한 역할도 하죠.(웃음) 작곡가마다 유머로 접근하는 방식이 다 다른데 거기서 얻은 여러 아이디어와 감동을 전하고 싶었어요."
이번 독주회는 하이든의 '피아노 소나타 다장조', 슈만의 '다비드동맹 무곡집', 쇼팽의 '5개의 마주르카', 파데레프스키의 '6개의 유머레스크' 등의 프로그램으로 구성된다.
"하이든은 음악에 나타난 수사적 장치를 부지런히 공부했어요. 보통 피아니스트는 무대에서 바디랭귀지를 잘 안 하는데 하이든은 몸 전체를 움직이지 않거나 아예 방향을 바꾸는 등 음악 외 표현력도 중시했거든요. 마주르카는 악보를 그대로 따라 할 수 없는 작품이에요. 많이 듣고 보고 받아들이는 게 중요합니다. 실제로 폴란드에서 마주르카 댄서들을 봤고 전통 연주자들의 음악을 많이 들었어요. 악보대로만 한다면 공허한 연주가 될 뿐입니다. 음악의 균형, 순서에 집중하는 소나타와 달리 여러 장치를 어떻게 조합할지 생각했어요. 가장 많은 영감을 얻을 때는 운이 좋은 실수가 나올 때죠."
자신의 수식어 '쇼팽 스페셜리스트'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할까. "어린 시절 저를 매료시킨 작곡가가 쇼팽이어서 행운이에요. 쇼팽의 작품은 연주자에게 다양한 해석의 여지와 풍부한 접근 가능성을 줘요. 무엇보다 쇼팽은 저를 한 인간으로 만들어줬어요. 제게 말을 걸었고, 제가 삶을 바라보는 방식에 영향을 끼쳤죠. 쇼팽의 음악은 순수하고 신선하며 아무것도 섞이지 않았어요. 쇼팽의 핵심은 바로 표현의 자유예요. 그저 음악을 즐기고 감상하며 제게 음악이 직접 느껴지도록 해야 하죠."
그는 유럽에서 활동하며 11년간 영국 왕립음악원의 교수를 역임했다. 2015년부터는 미국으로 거주지를 옮겨 마이애미 대학 프로스트 음악원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있다. 쇼팽 콩쿠르와 부조니 콩쿠르 등 국제 피아노 콩쿠르 심사위원으로도 활동 중이며, 쇼팽 페스티벌 예술감독을 맡기도 했다.
"균형을 이루려고 해요. 아티스트, 교육자, 심사위원으로서 각각의 밸런스를 이루고 싶어요. 심사위원이라는 역할에서는 객관적인 기준이나 동등한 기준을 가지고 연주가들을 평가하는 것보다 퍼포먼스를 넘어선 무언가를 보려고 하는 편이죠. 연주의 정확성보다 연주자가 음악을 정말 느끼고 있는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건지 보려고 합니다. 교육자로서는 학생이 교수의 말을 단순히 따르는 게 아닌 조언을 받아들여 새로운 창작물을 낼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를 보고요. 피아니스트로서 저 자신을 분석하고 판단하는 건 아직도 어렵습니다. 음악의 모든 요소를 제어하고, 컨트롤하려고 마음먹는 순간 음악은 제한적이게 되니까요."
케너는 실내악 연주자로도 꾸준한 활동을 해왔다. 체리스트 매트 하이모비츠와 호흡을 맞추었고, 2011년 대관령국제음악제(현 평창대관령음악제)에 참여하면서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 피아니스트 조성진과 인연을 쌓았다. 까다롭기로 소문난 정경화는 그를 '영혼의 동반자'라고 부르며 8년째 듀오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정경화는 음악을 벗어나 인생을 바라보는 관점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줬어요. 모든 것에 관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죠. 함께 작업하고 공연할 때 우리 듀오를 이끄는 영혼의 결합을 느낍니다. 서로의 어떤 부분을 충족시키죠."
케너는 "조성진을 처음 만났을 때 정말 감명받았다"고 했다. "이 학생은 내 조언을 듣기만 하는 게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해석을 해내는구나 싶었어요. 지난여름에 만났을 때는 자신의 목소리도 내고 음악에 접근하는 방식으로 성장했더라고요. 요즘도 종종 본인이 작업한 곡을 보내오곤 해요. 작게나마 그의 인생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감사하고 뿌듯합니다."
그는 악보를 벗어날 줄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쇼팽에게 피아노를 배운 학생은 '쇼팽도 자신의 악보를 연주할 때 그대로 하지 않았다'고 일기를 남겼다고 전했다. 슈만은 악보 중 한 장에 '가장 빠르게 연주할 것'이라고 해놓고, 그다음 장에 '더 빠르게'라고 적어두기도 했다. 사실상 불가능한 이 말의 의도를 알아차리는 게 연주자의 역할이라는 게 케너의 설명이다. 의도를 파악한 뒤 자신만의 해석을 하는 것은 음악가에게 자유를 준다.
"처음 악보를 받아들면 작곡가가 어떤 생각으로 이런 지시를 했는지 고민합니다. 동시대를 산 예술가를 분석하기도 하고, 역사적·문화적 배경도 공부합니다. 의도를 알아차리고 나면 악보를 따라가려고 하지 않아요. 악보는 연주의 시작점을 알려줄 뿐, 종착지가 아니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