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고 확보라는 단기 처방 외에 마땅한 대응책이 없어 발만 동동
한국을 백색국가(수출 절차 간소화 대상국)에서 제외한 일본이 반도체 다음 타깃으로 화학이나 자동차용 배터리 등을 겨냥할 가능성이 커졌지만, 기업들은 재고 확보라는 단기 처방 외에 마땅한 대응책이 없어 발만 동동 구르고 있다.
자동차의 부품의 95% 가량 국내에서 조달하는 현대·기아차는 일본의 수출규제 영향권에서 벗어나 있지만, 대부분 일본 제품을 쓰고 있는 협력사들은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다.
정부는 일본의 백색국가 제외 방침에 대응해 ‘159개 품목 집중관리’ 전략을 세우고, 기업들과 대응책 마련에 머리를 맞대고 있다.
4일 업계에 따르면 화학업계는 일본의 보복 정책으로 인한 부정적 영향이 전반적으로는 크지 않다고 보고 있다.
톨루엔, 자일렌 등 일부 제품의 경우 일본 수입 의존도가 높지만, 수입 물량 대부분이 한·일 합작 회사에 투입되고 있어 규제 대상에 포함될 가능성이 작을 뿐 아니라 전세계 어디에서도 구매가 가능하다고 분석한다.
정부가 지난 2일 “해당되는 기업에 예산, 세제, 금융, 관세 등을 우선적으로 지원할 것”이라고 언급한 159개 관리품목 중 화학 분야는 40여 개로 가장 많았다.
다만, LG화학, 삼성SDI, SK이노베이션 등 국내 기업들이 글로벌 탑티어(Top-tier)로 자리잡고 있는 배터리 업계는 이번 화이트리스트 제외로 긴장감을 높이고 있다.
핵심 소재 중 양극재, 음극재는 일본 수입 비중이 15%를 하회하는 상황이지만, 파우치 필름과 바인더 등 일부 공정용 소재의 일본 의존도가 80% 이상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오는 28일 예정된 백색국가 제외 시행 이후, 기업들이 받을 혼란을 최소화하기 위해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재고 확보 외에는 없다.
이에 LG화학은 ‘시나리오 플래닝’에 돌입, SK이노베이션 역시 리튬이온배터리 분리막(LiBS) 양산 일정을 앞당기는 등 여러 방안을 마련하고 있지만 이 역시 시간이 오래 걸리는 장기적인 전략이다.
기존에 규제 대상에 오른 반도체 핵심소재 관련 업체들도 28일 이전 부품·소재를 확보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삼성전자를 중심으로 관련 업계는 적게는 3개월, 많게는 6개월 치의 일본산 부품 재고를 확보하기 위한 비상경영체제를 가동 중이다.
SK하이닉스 역시 이석희 대표이사와 김동섭 대외협력총괄 사장이 일본 원자재 협력사 방문해 수급 방안을 논의했다.
아울러 일본 의존도가 높은 공작기계, 미래 자동차 업계 역시 핵심 소재 물량 확보에 어려움을 겪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수소전기차의 핵심인 수소탱크에 적용되는 탄소섬유의 규제 가능성이 높게 점쳐지면서 긴장을 늦추지 않고 있다. 수소차나 수소충전소향 판매 물량이 지금은 많지 않지만 앞으로가 문제다.
또 자동차 내연기관 자동차의 경우, 1대에 사용되는 부품은 3만개에 이르며 1, 2, 3차 협력사 체제로 완전히 국산화하거나 다른 국가에서 조달하기는 어렵다는 지적도 많다.
아울러 전장부품에는 일본산 소자와 커넥터 등이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으며, 전자제어장치(ECU)와 관련된 수정 공진자(crystal resonator)는 일본산이 대부분인 것으로 알려졌다. 자동차 공장의 생산라인이 일본 제품으로 구성된 것도 문제가 될 수 있다.
이처럼 산업 전반적으로 수개월 치 물량을 미리 확보하기 위해 사활을 걸고 있지만, 재고 물량 소진 이후가 진짜 문제다. 공급선 다변화 외에는 자체적인 기술 개발(R&D) 여력이 안 돼, 당장은 뚜렷한 해법이 없기 때문이다.
업계 전문가들은 이르면 3개월 후부터 국내 기업들 생산이 차질을 빚을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한 재계 고위 관계자는 “일단 최대한 재고를 많이 확보해 급한 불을 끄고, 대책을 마련할 시간을 버는 게 중요하지만 기술 투자 등은 상당한 시간을 필요로 해 단기적으로는 암담하다”라고 하소연했다.
이 같은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정부가 나섰지만 실효성에 대한 의구심이 제기되는 상황이다.
정부는 사실상 ‘경제 전면전’에 대비하면서 일본을 한국의 백색국가 명단에서 마찬가지로 빼기로 했다.
하지만 실제 일본에 타격을 줄 만한 수출품이 많지 않아 얼마나 영향을 미칠지는 미지수며, 일본 조치를 세계무역기구(WTO) 협정 위반이라며 제소를 추진하고 있는 상황에서 맞대응할 명분이 사실상 없다는 문제점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