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일환의 Aim High] 기해왜란, 평택대첩의 서막

입력 2019-08-09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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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경제부장

이 이상한 나라의 사람들은 평소엔 이게 나라냐, 헬조선이다 사분오열 제 나라 욕하기 바쁘다가 외세의 위협이 닥쳐오면 갑자기 전투대오를 갖추는 묘한 습성이 있다. 달구고 때릴수록 강해지는 강철마냥 어려움을 만나면 잠자던 슈퍼 파워가 깨어나는 미스테리도 지녔다. 위기가 지나간 뒤 계단을 오르듯 달라진 위상에 스스로가 어리둥절해하는 순진한 구석도 있다.

2016년 12월 삼성전자에 TV용 LCD패널을 공급해오던 일본 샤프(Sharp)는 아무런 사전 협의 없이 공급을 중단한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샤프는 당시 애플 아이폰을 위탁생산하는 폭스콘을 거느린 대만의 대표 전자기업 훙하이그룹에 인수된 상태였으며, 궈타이밍 훙하이그룹 회장은 평소 “삼성을 무너뜨리는 것이 인생의 목표”라고 말할 만큼 삼성을 못잡아먹어 안달이 난 사람이다.

삼성의 등에 칼을 찔러 넣은 직후 샤프는 아쿠오스 8K TV를 삼성전자보다 먼저 내놓으며 ‘세계 최초 8K TV’ 타이틀을 뺏는 데 성공했다. 판매 대수를 1000만 대까지 끌어올려 삼성에 공급하던 패널을 소비하겠다는 야심찬 청사진도 냈다.

기습을 당한 삼성은 샤프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내는 한편 백방으로 대체 공급지를 물색했다. 하지만 삼성이 원하는 고품질 패널을 갑자기 대량 생산할 수 있는 기업을 찾는 것은 쉽지 않았다. 결국 삼성은 자존심을 접고 LG에 도움을 청했다. 틈만 나면 으르렁대던 LG였지만 이번엔 흔쾌히 삼성이 내민 손을 잡았다.

안타깝게도 사용하는 기술이 너무나 달라 삼성과 LG의 역사적 컬래버는 성사되지 않았다. 삼성전자와 LG디스플레이는 연구개발 단계에서 협력을 멈췄고, 삼성은 중국 업체를 통해 샤프의 공급물량을 대체할 수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삼성전자 LCD TV에서 샤프 물량이 차지하는 비중은 10% 정도, 반면 샤프는 LCD패널 전체 생산물량의 40~50%를 삼성에 납품하고 있었다. 딴에는 가미카제식 공격이었을지 몰라도 결과는 할복이었다.

2년여의 시간이 흐른 올해 초, 샤프가 삼성전자에 다시 찾아왔다. 가련한 4개의 섬 조각이 강자 앞에서 늘 그러하듯 “LCD패널을 다시 구매해 달라”며 머리를 조아렸다. 삼성은 변함없는 글로벌 TV시장 1위이며, 샤프는 아쿠오스 상표권마저 중국 하이센스에 넘겼다.

올림픽 금메달보다 전국체전 4강이 더 어렵다는 양궁 무대의 뒤편에도 외부 공격에 맞선 우리 기업의 치열한 역사가 존재한다. 올림픽 양궁에서 금메달은 당연히 우리 차지인 줄 알고 있다면 오해다. 개인전 기준으로 남자 양궁은 2012년 런던 올림픽이 사상 첫 금메달이다.

1996년 미국 애틀랜타 올림픽을 앞둔 시점, 양궁용 활 시장 세계 1위인 미국 호이트(Hoyt)는 한국 대표팀에는 활을 공급하지 않겠다고 통보했다. 세계 양궁용 활 시장은 호이트와 일본 야마하가 양분하고 있었다. 호이트가 70%가량을 장악한 최강자였고, 야마하가 멀찌감치 떨어져 뒤쫓는 형국이었다. 당시 한국은 여자 대표팀이 야마하를, 남자팀은 호이트를 사용하고 있었다. 여자팀은 김경욱 선수가 과녁 정중앙에 설치된 카메라를 박살 내는 ‘퍼펙트 골드’를 한 경기에서 두 번 이나 보여주며 금메달을 따내는 등 전 종목을 석권했다. 하지만 남자팀은 호이트 활을 사용한 미국이 단체전과 개인전 금메달을 휩쓰는 장면을 지켜보며 분루를 삼켜야 했다.

호이트의 덧없는 애국심은 올림픽이 끝난 뒤 한국이 세계 활 시장 판세를 엎어버리는 결과로 이어진다. 묵과할 수 없는 도발로 판단한 대한양궁협회는 “국내 대회에서는 국내 기업이 만든 활만 사용할 수 있다”는 규정을 만들고 후원사인 현대자동차의 도움을 얻어 활 제작을 독려하기 시작했다. 당시 국내에는 삼익악기 계열사인 삼익스포츠와 중소기업 윈앤윈 두 곳이 양궁용 활을 생산하고 있었다.

4년 뒤 호주 시드니 올림픽, 우리나라 선수 전원이 ‘SAMIK’과 ‘W&W’가 선명한 활을 들고 4종목 중 3개의 금메달을 쓸어 담는 장면이 생중계됐다. 금손이 만든 활을 쥔 신궁이 위용을 뽐냈으니 세계 시장은 금세 한국 기업들의 독무대로 변했다.

아쉽게도 삼익스포츠는 모기업인 삼익악기의 경영 악화로 2015년 부도가 나고 말았다. 하지만 윈앤윈은 달랐다. 회사 설립자 전원이 양궁선수 출신인 이 회사는 성장을 거듭해 세계 1위 자리를 뺏은 데 이어 일본 야마하를 아예 인수해 버렸다. 동이족을 건드린 호이트는 더 이상 시장 점유율이 의미가 없는 군소업체로 전락해 겨우 명맥을 잇고 있다.

정교한 듯 어설픈 일본의 도발이 우리 기업에 꽤 타격을 줄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번 일로 우리 기업들이 또 한번 계단을 오르게 될 것 또한 믿어 의심치 않는다. 특히 기습공격을 당한 삼성의 평택 반도체 생산라인이 되레 ‘기해왜란’을 승전으로 이끄는 선봉이 되어주기를 기대해 본다. 혹시라도 ‘한국은 일본 덕에 발전했다’는 헛소리가 이런 깊은 뜻을 담고 있다면, 아베상~ 아리가토! wh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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