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은 지금] 대처주의를 되돌리려는 영국 노동당

입력 2019-09-25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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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병억 대구대 국제관계학과 교수·팟캐스팅 안쌤의유로톡 운영자

철도와 전기, 수도 등 주요 산업의 국유화. 250명 이상의 노동자를 고용 중인 기업은 주식의 10%를 노동자 대표가 운영하는 기금에 증여. 이사회 구성원의 3분의 1을 노동자 대표에게 배분. 노동조합의 권한 대폭 강화. 부자세 대폭 인상.

영국의 제1야당인 노동당이 이 같은 경제정책을 제시하며 조기 총선을 대비 중이다. 한마디로 1980년대 영국 보수당의 마거릿 대처 총리가 작은 정부, 민영화, 규제완화를 내세우며 이룩한 경제의 큰 틀(대처주의)을 전면적으로 뜯어 고치겠다는 게 노동당의 생각이다. 1945년 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 집권한 클레멘트 애틀리의 노동당 정부는 주요 산업의 국유화, 전 국민 무료 건강보험(NHS) 시행으로 복지국가 기틀을 마련했다. 대처는 이런 정책 틀을 크게 바꾸었는데 노동당은 이를 다시 크게 고치고자 한다.

대처주의가 ‘영국병’을 앓았던 나라에 경제부흥의 계기가 됐다고 여기는 신봉자들이 많다. 이들에게 노동당의 경제정책은 말도 안 되는 전형적인 포퓰리스트 정책이다.

그러나 선진국 중 하나인 영국에서 왜 이런 대안이 나왔는지, 그 이유를 따져봐야 한다. 한마디로 대처주의가 경제적 불평등을 야기하고 2008년 미국발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영국 등 유럽으로 전이된 경제위기의 한 원인이 되었다. 그리고 노사의 한 축인 노동자의 권한을 약화시켰기 때문에 이를 바꾸지 않고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보기에 노동당의 이런 대안이 제시됐다.

제레미 코빈 노동당 당수는 2015년 9월 예상을 뒤엎고 당원의 압도적 지지를 받아 제1 야당의 당수가 됐다. 평생을 마르크스주의자로 살아온 그는 전임 노동당의 우측에 기운 정책에 지치고 실망한 젊은층을 진보적 경제정책을 제시하며 파고 들었다. ‘모멘텀(Momentum)’이라는 풀뿌리 단체가 그의 정책을 강력하게 지지하고 당원 모집에 큰 힘을 보탰다. 당수 취임 전 19만 명이 조금 넘던 노동당원 수는 2019년 1월 말 기준으로 55만 명을 넘었다. 선진국의 주요 정당 가운데 당원이 최근 몇 년 새 급증한 아주 예외의 정당이다.

영국에서 조기 총선은 시기만 문제이지 늦어도 내년 상반기 안에 치러질 가능성이 높다. 다음 달 19일까지 유럽연합(EU)과 탈퇴조약을 재합의하고 이것이 영국 하원에서 통과되지 못하면 내년 1월 31일까지 EU 탈퇴를 연기하는 ‘노 딜 브렉시트’ 방지법이 지난 9일 영국에서 발효됐다. 보리스 존슨 총리는 이 법을 시행하지 않겠다고 큰소리 치지만 노동당을 비롯한 자유민주당 등 야당은 이 법이 시행되고 나서야 보수당 총리의 조기 총선 요구에 응하려 한다. 설령 탈퇴조약이 비준된다 해도 총선을 거치지 않고 총리가 된 존슨은 유리한 시기를 저울질해 조기 총선을 치르고 승리하여 민주적 정통성을 확보한 뒤 자신의 강경 브렉시트 전략을 이행하려 할 것이다. 이 때문에 조기 총선에 대비해 노동당의 대안적 경제정책이 구체화됐다. 브렉시트에 따른 경제적 손실이 더 커지기 전에 총선을 치르는 것이 현 집권 보수당에 유리하다. 따라서 늦어도 내년 상반기 안 선거 실시가 유력하다.

영국의 주요 기업들이 가입한 경제인연합회(CBI)는 노동당의 정책이 실행된다면 7000여 개의 회원사가 손실을 볼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리고 아무런 보상 없이 노동자에게 주식을 증여하면 사측이 줄소송을 낼 것이라고 경고하고 나섰다.

영국 대기업의 몇몇 최고경영자들은 노동당 집권 시 영국을 떠날 것이라는 말도 서슴지 않는다. 그러나 영국이 EU에서 탈퇴하면 다른 EU 회원국으로의 자유이동이 제한되기에 부자들의 탈영국 리스트 가운데 갈 수 있는 나라가 줄어든다.

몇 달 안에 치러질 수 있는 총선 결과를 예단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보수당이나 노동당이 과반을 확보하지 못해 정치적 불확실성이 계속되는 상황을 점치기도 한다. 이럴 때 노동당이 가장 친유럽적 자유민주당과 연립정부를 구성할 수 있을까? 자민당은 코빈 노동당 당수를 신뢰하지 않는다. 브렉시트 번복을 공식 강령으로 채택한 자민당에는 EU 탈퇴에 대한 노동당의 애매모호한 태도가 협력을 가로막는다. 노동당은 노동자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브렉시트 전략을 추구하겠다며 EU와 재협상, 그리고 제2 국민투표도 거론 중이나 신뢰성이 떨어진다. 노동당의 정책 우선순위는 대처주의 번복이다. 이럴 경우 EU의 조약이나 규정 등이 정책 이행의 장애물이 될 수 있다. 정당의 목적은 정권 획득이다. 노동당이 총선에서 승리해야 이런 정책도 시행이 가능하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노동당의 단독 집권 가능성은 낮다. 반면에 신자유주의의 누적된 폐해를 시정하려는 한 대안으로 노동당의 공약은 신중하게 검토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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