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진의 만년필 이야기] 44. 힘을 뺀다는 것은

입력 2019-10-01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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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필 연구소장

팔 벌려 뛰기, 온몸 비틀기 등 PT체조와 선착순 달리기 등으로 시작하는 유격은 군생활의 꽃이다. 그리고 그 유격의 하이라이트는 외줄타기와 행군이다. 수십 킬로미터를 걷는 행군이 발바닥에 물집이 생기는 등 육체의 극한을 시험하는 것이라면, 외줄타기는 인간이 가장 공포를 느끼는 높이에서 줄을 타야 하는 강한 정신력을 요구한다. 필자 역시 육군 병장 출신으로 군 생활 중 여름이 되면 빠짐없이 유격훈련을 받았다. 그것도 세 번. 그중 첫 번째 유격의 외줄타기는 지금도 생생하다.

“힘 빼라고 힘!” 호랑이보다 더 무서운 선임들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들려왔다. 아래는 열 길이 넘는 낭떠러지. 속으로 “힘을 왜 빼라는 거지, 이 줄을 놓치면 죽을지도 모르는데”라고 생각하며 줄을 꽉 잡는 순간 내 몸은 뺑그르 돌면서 뒤집혔다. 그땐 이런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수영장에서 배영(背泳)을 배울 때 몸에 힘을 주면 꼬르륵 하고 가라앉는 것처럼 외줄타기 역시 힘을 주면 안 되는 것이었다.

만년필로 글을 쓰는 것도 마찬가지다. 만년필은 정교하게 세공된 펜촉과 몸체가 은으로 만들어진 것, 옻칠된 것 등 예쁘고 고급스러운 필기구의 대명사이지만, 가장 큰 장점은 뭐니 뭐니 해도 힘들이지 않고 쓸 수 있다는 것이다. 볼펜에 들어가는 유성잉크보다 점도(粘度)가 낮은 수성잉크는 펜촉 끝에서 흘러나와 선(線)을 만드는데, 종이 역시 이 수성잉크를 잘 흡수하여 만년필을 잡은 손은 방향만 바꿔주면 글을 쓸 수 있다. 이렇듯 힘을 빼고 만년필로 글을 쓰는 것이 숙련되었다면, 억지일지 모르지만 내 눈엔 메이저리그의 류현진 선수가 투구하는 모습 같고 김연아 선수의 점프처럼 아름답다. 이 아름다운 글쓰기의 시작 역시 만년필을 부드럽게 힘을 빼고 잡는 것이다. 만년필을 세우는 각도는 50도 내외. 작은 달걀을 쥐듯 손을 가만히 내려놓고 만년필을 세 번째 손가락에 올려놓고 검지와 엄지로 고리를 만들어 살짝 감싸듯 잡는다. 목과 허리를 곧게 세우고 옆구리와 팔꿈치 사이는 주먹 한 개 정도의 공간을 주고 손목은 안쪽이나 바깥쪽으로 꺾지 않는다. 필기(筆記)는 볼펜처럼 꾹 누를 필요 없이 종이에 슬쩍 올려놓고, 손가락보다는 팔목과 팔뚝을 이용하여 글씨를 쓰면 된다.

▲바람직한 만년필 잡기.
자세를 갖추었다면 다음엔 본인에게 맞는 만년필을 선택하는 것이다. 크고 화려한 만년필을 원할 수도 있겠지만, 이 역시 맞지 않으면 힘들어 오래 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내 손에 맞는 만년필은 어떤 것일까? 가장 중요한 것은 손의 크기이다. 뚜껑을 꽂았을 때 손 전체 길이에서 한 마디 정도 작은 것이 잡았을 때 편하다. 예를 들면 손을 쫙 폈을 때의 길이가 18㎝ 정도라면 손가락 한 마디인 약 3㎝를 빼면 15㎝ 정도의 만년필이 적당하다는 것이다. 또 손가락이 굵은 사람이라면 굵은 것을, 반대인 경우라면 가는 만년필을 고르면 된다. 재미있는 것은 만년필 사이즈 구분이 길이보다는 굵기를 우선한다는 것이다. 만년필 세계에서 전통적으로 오버사이즈로 불리는 것은 약 1.3㎝ 이상을 말하는데, 이런 기준이 생긴 것은 펜촉을 중요하게 보기 때문이다. 큰 펜촉은 굵은 몸통을 갖고 있어야 끼울 수 있기 때문이다. 무게 역시 중요한 고려 대상이다. 보통 성인 남자의 경우 25g 정도가 적당하고 평균 이상이라면 30g 정도가 적당하다. 여성은 여기서 5g 정도 빼면 적당하다.

정작 내 글쓰기(작문·作文)는 언제쯤 힘이 빠질까? 더 많이 읽고, 더 많이 쓰는 것이 답이겠지만, 누군가 알려준다면 만년필 10자루 아니 100자루를 주고 그 비법(秘法)을 배우고 싶다.만년필연구소장/연재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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