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재채기를 하면 세계 경제가 독감에 걸린다’라는 공식이 깨지고 있다. 1981년 고금리, 2001년 닷컴버블 붕괴, 2008년 서브 프라임 모기지 부실 사태. 일련의 사건들은 모두 미국이 시발점이 돼 세계 경제를 리세션(recession, 경기침체)으로 몰아넣었지만, 올해 들어서는 이 구도가 역전되고 있다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이 3일 분석했다.
WSJ에 따르면 역사적으로 미국 경제는 외부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다. 경제에서 수출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지 않은 데다 금융시장은 미국의 금리와 물가, 경기 동향 등 자체 요인에 좌우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들어 이런 구도에 변화가 일고 있다. 우선, 중국 경제의 대두와 함께 세계 국내총생산(GDP)에서 미국이 차지하는 비율이 줄어들고 있다. 두 번째로, 미국 경제에서 무역이 차지하는 비율이 늘면서 미국 기업의 이익에서 해외 매출 기여도가 높아졌다. 세 번째로는 자본시장 통합이 진행되면서 미국 금리가 국제 정세에 크게 영향을 받게 됐기 때문이다. 외국 중앙은행이 금융 완화에 나서면 달러 값이 오르고, 그렇게 되면 미국 수출업체의 부담이 커진다. 금리가 제로(0)에 가까울수록 한층 영향을 받기 쉬워진다.
미국 매크로이코노믹어드바이저스는 “2분기에 이어 3분기에도 설비투자와 무역이 부진해 미국 경제에 하방 압력을 넣을 것”으로 전망했다. 아울러 미국 경제가 연율 2% 가까운 성장을 하고 있고, 강력한 개인소비가 이를 뒷받침해왔지만, 이 역시 꺾일 조짐을 보이고 있다고 지적했다.
도널드 트럼프 정부가 관세 인상을 단행했을 때 미국 경제는 영향을 받지 않을 줄 알았다. 관세를 올리면 미국으로 고용과 생산이 돌아오고, 타격이 있다 해도 상대국 쪽이 크다고 예상했다. 다른 나라가 미국으로 수출하는 물량이 미국이 다른 나라로 수출하는 양보다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관세는 미국에 되레 부메랑이 됐다. 관세로 타국에 준 고통이 ‘세계 경기 침체’라는 형태로 미국에 영향을 주게 된 것이다. 세계 경기 침체는 미국의 투자와 수출을 위축시킨다.
모리 옵스트펠드 전 국제통화기금(IMF)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세계의 밸류체인(가치의 연쇄)과 그것이 어떻게 재구축되는가를 둘러싼 전반적인 불확실성이 많은 나라에 큰 악영향을 미친다”고 지적했다.
가장 주목할 건 세계 경제의 중추인 미국마저 흔들리는 상황에서 금융 당국의 카드가 얼마나 남아 있느냐는 것이다. WSJ는 남겨진 대응 수단이 거의 없다고 봤다.
유럽중앙은행(ECB)의 경우, 지난달 12일 열린 통화정책회의에서 3년 만에 양적완화를 재개했다. -0.4%였던 예금금리(기준금리)를 -0.5%로 마이너스 폭을 더 확대하고, 정부에 대해선 재정 지출 확대로 중앙은행의 부족한 여력을 보완하라고 촉구했다. 마이너스 금리와 재정 정책을 모두 동원해도 유로존 경제를 회복시키지 못하면 유로화 약세를 용인해 수출을 지원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미국을 포함한 주요 무역 상대국은 피해를 볼 수 있다.
옵스트펠드 전 IMF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최근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에 낸 논문에서 “구조적인 수요 약세가 미국 외 나라에 금리 인하를 압박하면 미국 연방준비제도(Fed, 연준)가 금리를 내리지 않는 한 달러 강세를 통해 미국에 디플레이션 압력을 초래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이달 말 열리는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에서 이 문제가 논의될 것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