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만여 업체 모인 경기 반월·시화 산단… 문 닫는 기업 속출, 임대 현수막 즐비
전국에 뿌리산업 특화단지 33개 조성… 국비 지원율 확대·근무환경 개선 노력
1981년 설립된 한국주물공업협동조합은 9월 기준 216개사로 구성돼 있다. 회원사 중 외부감사를 받은 50여 개사의 지난해 매출액은 1조3656억 원이다. 이는 2011년 1조7647억 원에서 22.6% 줄어든 수치다. 이 조합에 따르면 매년 폐업하는 업체들도 꾸준히 나오고 있다. 2012년부터 현재까지 조합 회원사 중 폐업 등록을 한 업체는 30곳에 달한다.
비단, 주물업계만의 일이 아니다.
전국 최대 중소 제조업 밀집 지역인 경기 안산의 반월·시화 산업단지는 자동차·전자·기계부품업체와 뿌리기업 2만여 개가 입주해 있다. 하지난 최근 이 산업단지에는 공장 매매 또는 임대 현수막이 즐비하다. 휴업하거나 폐업하는 기업들이 속출하고 있는 것. 주조·금형·용접·열처리·표면처리 등 뿌리산업계 전반이 3D 업종이라는 인식으로 인한 인력 부족과 고령화 그리고 각종 규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앞으로 다가올 주52시간 시행은 더 큰 걱정거리다. 인력 자체가 부족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뿌리산업은 주조·금형·용접·열처리·표면처리 등 제조 공정기술을 활용한 업종을 이른다. 자동차, 조선, 정보통신(IT) 등 국가기간산업인 주력 제조업의 경쟁력을 높이는 기초산업이다.
국내 제조업 수출이 10월 초 기준으로 10개월 연속 감소세를 보이고 있다. 수출 감소폭은 6월 13.8%에 이어 지난달 20% 넘게 늘었다. 미·중 무역분쟁 심화와 일본 수출규제 등이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분석이다. 전문가들은 역대 정부마다 신산업을 육성해 수출 전략산업으로 키우고 있으나 별 소득 없이 용두사미에 그친다고 지적한다. 최근 일본 수출규제 이후 문재인 정부는 국내 제조업 육성을 부품·소재·장비 산업에 역점을 두고 있다. 이런 가운데 ‘뿌리산업’ 부흥에 보다 큰 역점을 둬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신기술경쟁 시대, 다시 뿌리산업이 뜬다
전국의 뿌리산업 특화단지는 모두 33개, 단지 내 입주기업은 1059개사에 달한다. 뿌리산업 특화단지는 뿌리기업의 집적화와 협동화로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2013년부터 지정돼왔다.
올해 추가로 지정된 4곳은 경북 구미 금형산업, 대구 국가산단표면처리, 부산 녹산표면처리, 전북 익산 등으로 모두 110개 업체가 뿌리산업 육성 지원을 받게 된다. 정부는 올해부터 국비 지원비율을 30%에서 50%로 올리고, 공동활용시설 지원 대상에 편의시설을 포함해 뿌리기업의 근로환경 개선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또한 특화단지 재정지원 확대를 위해 올 11월부터 총 5회 권역별 설명회를 열어 잠재적 수요 발굴을 추진, 12월 중 성과보고회를 통해 지자체 및 특화단지 관계자들과 뿌리산업 육성 성과를 공유할 방침이다.
정부는 뿌리기술 전문기업을 육성하기 위해 고시를 정비하고, 핵심 뿌리기술 지정요건을 구체화했다. 전문기업 선정 시 각종 연구개발(R&D)과 자금·금융 지원, 인력공급양성사업 등 지원제도에서 우대가점 등 혜택을 부여한다. 뿌리기술 전문기업은 핵심 뿌리기술을 보유하고, 총 매출액 중 뿌리기술을 이용한 사업 매출액이 50% 이상으로 기술 수준과 경영역량 등이 우수한 뿌리기업을 말한다.
정부는 뿌리산업 육성을 위해 ‘뿌리산업 일자리 생태계 조성’사업도 추진하고 있다. 이를 통해 지난해 5월부터 올해 5월까지 약 1년간 뿌리기업을 중심으로 1770명의 일자리가 만들어진 것으로 나타났다. 뿌리산업은 제조업의 근간을 형성하지만 소위 ‘3D’ 직종이라는 인식이 강해 청년 취업자들이 기피하거나 숙련되지 않은 중장년층이 유입되는 어려움이 컸다. 이에 정부는 △기업 성장 지원 △일하기 좋은 근로 환경 조성 △연령대별 일자리 교육 등을 통해 뿌리산업 일자리 늘리기를 펼쳐왔다.
◇규제의 늪, 뿌리산업에 사활 건 정부
정부의 뿌리산업 육성과 달리 현장에서는 인력 부족과 각종 규제로 몸살을 앓고 있다고 하소연한다. 특히 주물공업을 중심으로 정부의 규제가 산업 자체의 근간을 흔든다는 지적이다. 주물공업 업체들이 주장하는 것은 ‘화학물질 등록 및 평가에 관한 법률(화평법)’, ‘화학물질관리법(화관법)’ 등의 규제 완화다. 내년부터 규제가 심화되는데, 모든 유해화학물질 취급 시설에 예외 없이 법이 적용된다. 주물공업 기업들은 강화된 법을 지키지 못해 범법자로 몰리는 업체가 수없이 양산될 것을 우려하고 있다. 이 밖에 중소기업 전용 전기요금 도입, 외국인 근로자 수습제 등도 뿌리기업들이 요구하는 규제완화 조치다. 여기에 대기업과의 동반성장 역시 뿌리기업이 정부에 요청하는 부분이다.
정부는 주조, 금형, 표면처리 등 대다수 뿌리 업체들의 규제 심화 대책안을 내놓겠다는 복안이다. 이에 뿌리산업 기술 도약을 위해 향후 5년 동안 1700억 원의 자금도 투입하기로 했다. 이른바 ‘제조혁신 기반인 넥스트 뿌리기술 개발 사업’이라는 프로젝트로 추진되는 이 사업은 내년부터 2024년까지 5년간 진행된다. 또한 정부는 기술 도약을 통해 외국과의 기술 격차를 좁히고 글로벌 가치사슬에 진입할 수 있는 뿌리 중견기업 40곳을 육성하기로 했다. 경제적 파급력이 큰 자동차, 기계·장비, 전자 등 3대 산업 171개 부품이 주요 지원 대상이 될 전망이다.
산업부 관계자는 “주력 산업의 품질과 가격 경쟁력을 좌우하는 국가 기반산업인 뿌리산업이 글로벌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도록 지원사업을 체계화하고 있다”며 “뿌리산업이 지속가능한 산업으로 발전해 세계 4대 제조 강국 도약을 뒷받침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을 방침”이라고 말했다.
◇ 흔들리는 뿌리산업, 현장에 답 있다
전국 1000개가 넘는 뿌리기업이 ‘제2의 부흥’을 꾀하기 위해선 현장에서 뿌리기업을 지원하는 경제 유관기관에 힘을 실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산업통상자원부와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등의 체계적 지원책 마련에 한국희소금속산업기술센터, 뿌리산업기술연구소, 한국금형기술교육원, 국가뿌리산업진흥센터 등 뿌리기업을 지원하는 경제기관들의 면면이 주목받는 이유다.
인천 송도에 있는 한국희소금속산업기술센터는 희소금속 산업 경쟁력 확보를 위한 희소금속 고순도 소재화 전문지원센터 구축 방안을 마련하고 있다. 희소금속은 일반금속에 비해 불순물 오염에 취약하고 고온용해 등 특수처리가 필요해 소재화를 위한 고성능 장비 구축이 필수적이다. 국내 희소금속 산업은 가공 및 단순 합금화를 하는 중소기업 중심으로 이뤄져 있고 고품질 소재부품을 공급하는 전문기업이 없어 센터가 이 같은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한국금형공업협동조합은 전문 금형인 양성을 위해 한국금형기술교육원을 설립했다. 경기도 시흥시에 위치한 교육원에는 132억 원이 투입됐다. 교육원은 인력 수급에 어려움을 겪던 금형 업계에 활기를 불어넣고 있다. 한국금형공업협동조합은 박순황 이사장이 이끌고 있다.
뿌리산업 육성을 위해 국가뿌리산업진흥센터도 제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 산하 국가뿌리산업진흥센터는 서울 강남 테헤란로에 위치해 있다. 특히 센터는 ‘일하기 좋은 뿌리기업’을 선정해 지원사업을 벌이고 있다. 일하기 좋은 뿌리기업은 근로·복지환경, 경영안정성, 성장역량 등이 우수한 뿌리기업을 선정해 지원한다. 2014년 7개사를 시작으로 △2015년 7개사 △2016년 6개사 △2017년 12개사 △2018년 12개사 등 지난해까지 모두 44개 업체를 선정했으며, 올해 역시 새롭게 선정작업을 진행 중이다.
일하기 좋은 뿌리기업에 선정된 업체 가운데 충남 아산테크노밸리 일반산업단지에 위치한 ㈜영광YKMC는 뿌리산업 업체지만 전 직원의 70%가량이 20·30대로 구성돼 있다. 공장 내 설비를 친환경 설비로 개선하고 각종 복지 제도를 마련해 청년들을 유입하는 데 성공했다. 실제 2017년 31명의 신규 인력을 채용했으며, 지난해 33명, 올해 16명을 인력을 채용해 충남도 고용창출 우수기업에도 선정됐다. 제2공장이 완료되면 40~50명의 인력을 별도로 채용한다는 방침이다.
장관섭 영광YKMC 대표는 “젊은 인력을 늘리기 위해 학자금 지원, 문화생활 지원, 자녀양육 지원 등을 하고 있다”며 “뿌리기업이 3D 업종이 아닌 젊은이들이 좋은 환경에서 일할 수 있는 곳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힘쓰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