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강연으로 이름 높은 허성도 서울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가 들려주는 옛일에 귀를 기울여 보시죠. 허 교수의 깊은 식견에 무식한 기레기의 짧은 앎을 더했습니다. 원래 기레기가 머리는 나쁜데 귀는 또 밝아서 이런저런 이야기 잘 받아 적습니다.
초등학교에서는 ‘조선이 500년 만에 망한 이유 4가지’를 배웁니다.
사색당쟁, 대원군의 쇄국정책, 성리학의 공리공론, 반상제도가 조선을 망국으로 이끈 4대 주범입니다. 학생들 머릿속엔 넷 중 뭐가 남을까요? 엉뚱하게도 “망했다”가 제일 크게 남습니다. 어찌된 일인지 고구려와 백제 700년, 신라 1000년, 고려 500년, 조선 500년으로 이어진 2700년의 기록보다 ‘당파 싸움하다 망했다’가 강렬하게 자리 잡습니다. 그것도 하필 왜놈들 손에 망한 비루한 나라로 기억됩니다. 이 불괘함은 종종 한국전쟁 직후 좌우대립의 극렬한 기억으로 이어지기도 하지요.
그런데 ‘망했다’와 ‘왜놈들’ 때문에 머릿속에서 사라진 숫자를 다시 꺼내보면 이상한 구석이 있습니다. 맨날 쌈질이나 하는 족속이 어떻게 500년, 700년, 1000년을 버텼을까요? 지구상에서 500년 이상을 버틴 왕조는 생각보다 별로 없습니다. 로마제국이 1000년을 넘게 이어졌고, 오스만투르크가 600년 이상 버틴 정도였습니다. 서양의 제국과 동양식 왕조의 차이일까요? 진시황이 세운 중국 최초의 왕조 진은 불과 15년, 삼국지의 무대가 된 한은 18년 만에 망했습니다. 370년 동안이나 갈라져 싸운 뒤 등장한 통일국가인 수도 38년으로 끝났습니다. 당 290년, 송 72년, 원 93년, 명 276년, 청 296년 등 중국도 300년을 넘긴 왕조는 없습니다.
맨날 싸우는 이 나라 사람들은 혹시 왕이 까라면 까는 노예근성까지 있어서 통치가 수월했기 때문일까요?
학교에서 배웠던 망이망소이의 난, 홍경래의 난, 동학운동을 기억하신다면 그 말이 틀렸음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을 겁니다. 특히 기록이 충실히 남아있는 조선시대를 보면 기가 찹니다. 조선왕조실록에 적혀있는 ‘전국 규모’ 민란만 20번입니다. 단순하게 계산하면 25년에 한 번씩 나라가 뒤집어졌고, 조선 백성이라면 누구나 살아있는 동안 한 번은 낫 쥐고 호미 들고 관군과 맞섰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상소제도는 어떤가요. 기생도 노비도 글만 쓸 수 있으면 왕에게 보냈습니다. 지방 관찰사나 중앙관리와 말이 안통하면 언제든지 ‘임금님 보세요’라며 직접 소통했습니다.
문제는 한자였습니다. 세종이 한글을 창제하고 언문상소가 허락된 뒤에도 이 문제는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생겨난 게 신문고입니다. 그래도 불만이 터져나왔습니다. 신문고는 궁 앞에 매달려 있으니 “한양사람만 사람이냐”고 대들기 시작했죠.
그래서 격쟁이라는 제도가 또 생겼습니다. 왕이 지방에 행차를 하면 꽹과리나 징을 쳐서 “임금 나오라 그래”라며 소란을 피우는 거죠.
말 뿐인 제도 였을까요? 정조실록을 보면 제위기간 24년 동안 상소와 신문고, 격쟁으로 해결한 사안이 5,000건입니다. 해마다 200건이니 이틀에 한건 이상 임금이 직접 백성들의 민원을 수리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이마저도 부족해서 영조의 경우 날짜와 장소를 정해 정기적으로 백성들을 만났습니다. 모이고 다투고 외치는 모습, 요즘 광장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기레기 꼴 보기 싫으신가요? 대통령 일상과 사생활까지 시시콜콜 다 알려고 드니 밉상인가요? 한마디 하면 백마디 따지고, 제 멋대로 해석해 대드니 어이가 없으신가요?
조선시대에는 경국대전에 그리하라고 못박아두고 왕이 거부할 수 없었습니다. 임금이 아침에 출근 하면 사관이 달라붙습니다. 왕이 침소에 드는 순간까지 하는 말을 다 받아 적고, 만나는 사람과 대화 내용을 다 기록했습니다. 왕이 혼자 있으면 혼자 있다고 적고, 화장실 가면 오늘 몇시에 똥싸고 오줌눴다고 적고, 승하하시면 마지막 숨을 쉬던 순간까지 적었습니다.
TV 사극을 보면 간신이 왕과 독대해 총기를 흐리는 장면에 분통이 터집니다. 후궁이 몰래 왕의 귀에 속닥속닥 꼬드기는 장면에선 ‘요망한 X’ 욕이 절로 나옵니다. 거짓말입니다.
왕은 사관 없이는 누구도 만날 수 없도록 경국대전에 명시해뒀습니다.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 때입니다. 하루 종일 쫓아다니는 사관이 지긋지긋했던 인조는 어느 날 대신들에게 “내일 어전 회의는 다른 방에서 할 테니 그리 모이시오”라고 밀지를 내린 뒤 몰래 회의를 열었습니다.
눈치보스 사관이 이미 “왕이 다른 방에서 몰래 회의를 열었다”고 써 놓은 뒤 지필묵을 싸들고 그 방에 들어오자 놀란 인조가 핑계를 댔습니다. “오늘 회의는 공식적인 자리가 아닌데 사관이 왜 왔는가”
씨알도 안먹히는 소리에 사관이 답했습니다. “마마가 계신 곳에는 사관이 있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조선이 국법입니다” 라고 한 뒤 그 말까지 그대로 적어 놓자 열 받은 인조는 그 사관을 귀향 보냈습니다. 다음 날 아침, 다른 사관이 출근하는 인조 옆에 달라붙어 이렇게 적었습니다. “주상께서 엉뚱한 죄목을 걸어 전임 사관을 귀향 보내시니 새 사관이 부임했다”
혹시 없는 일을 꾸며내거나 잘못 적었을 수도 있을까요? 사관은 현장에서 급히 적은 내용을 퇴근 후 집에서 다시 적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아는 사초입니다. 그리고 실록 편찬위원회가 구성되면 모든 기록을 다시 점검합니다. 영의정이 왕과 만났다고 써 있으면 영의정에게 “몇날 몇시에 왕과 만난 사실이 있으시오?”라고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최종본은 반드시 활자로 인쇄해 4부를 남겼습니다. 불과 4부를 찍기 위해 사람이 쓰지 않고 별도의 활자를 만든 것은 누구도, 한 글자도 고칠 수 없도록 하려는 조치였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실록은 왕 조차도 볼 수 없었습니다. 판단은 후손의 몫으로 남겨두고 영원히 봉인되도록 했습니다. 그럼 실록의 비밀은 지켜졌을까요?
세종대왕이 왕위에 오른 뒤 있었던 일입니다. 세종은 철권통치를 펼친 아버지 이방원에 대해 사관들이 뭐라고 써놨는지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태종실록을 가져오라 했죠. 무려 아버지의 최측근이면서 조선의 개국공신, 게다가 세종의 스승이던 좌의정 맹사성이 나섰습니다.
“아니되옵니다” “왜 그러하오?” “전하께서 선왕의 실록을 보시면 사관은 그것이 두려워 뜻대로 실록을 기술할 수 없습니다”
세종은 일단 참았습니다. 하지만 몇 년 못가 다시 태종실록을 대령하라 명했습니다. “선왕의 실록을 봐야 그것을 거울 삼아 선정을 펼칠 것이 아닌가”라는 핑계를 댔죠.
영의정 황희가 대듭니다. “보지 마시옵소서” “경은 또 왜 그러는가” “마마께서 선왕의 실록을 보시면 세자께서 주상전하의 실록을 보시려 할 것이고 세손께서는 세자저하의 실록을 보려할 것입니다. 오히려 조선왕은 영원히 실록을 보지 말라는 교지를 내려주시옵소서”
결국 조선에서 실록을 펼쳐 본 왕은 공식적으로는 없습니다. 중종이 몰래보다 들켰다는 기록까지 남긴 것 외에는요.
이게 나라냐, 일해라 절해라, 고나리 오지랖이 나라 망친 종특이라 생각하신다면, 바다 건너 왜나라가 심어놓은 식민사관에 제대로 낚인 겁니다. 오히려 왕이고 신하고 천민이고 각자 옳다고 믿는대로 떠들고, 보이는대로 기록하고, 그릇된 일 안된다고 말하는 자유가 대한민국의 1000년을 만들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