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1월 방한해 관계 개선 시도...미일 관계 강화에 힘써
‘전후 정치 총결산’을 내걸고 일본의 개혁을 주도했던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일본 총리가 29일 오전 도쿄의 한 병원에서 별세했다고 요미우리신문이 보도했다. 향년 101세.
나카소네 전 총리는 일본에서 전후 다섯 번째로 장기 집권한 총리로, 냉전 말기인 1980년대 초반부터 후반까지 약 5년간 집권했다. 일본에서 그는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과 만들어낸 ‘론·야스 관계’를 비롯한 정상 외교를 실천하고, 일본 국철 분할·민영화 등 재무·행정 개혁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논객으로 활동하며 ‘청년장교’라 불렸다. 고노파를 계승한 나카소네는 사토 에이사쿠 정권 비판에 앞장섰으나 1967년 사토 내각의 운수상으로 입각해 ‘가자미토리(風見鷄, 수탉 모양의 풍향계로, 줏대 없이 대세에 따라 태도가 변한다는 의미. 기회주의자)’라는 야유를 받기도 했다. 나중에 나카소네는 자신의 저서 ‘자성록(自省錄)’에서 “향후 총리를 목표로 하기 위한 파벌 전략”이라고 기록하기도 했다.
나카소네는 다나카 가쿠에이 내각에서는 통산상을, 미키 다케오 내각에서는 자민당 간사장을, 후쿠다 다케오 내각에서는 자민당 총무회장을, 스즈키 젠코 내각에서는 행정관리청장관을 각각 역임하고, 1982년 11월 자민당 총재 경선에서 가와모토 도시오, 아베 신타로(아베 신조 현 총리의 부친), 나카가와 이치로 등을 제치고 제71대 총리에 취임했다.
총리 취임 후 그는 ‘전후 정치 총결산’을 슬로건으로 내걸고 외교면에서 미일 관계의 ‘군사동맹’을 강화했다. 내정면에서는 ‘국철 개혁’으로 큰 성과를 올렸다. “철도는 행정개혁의 203고지”로 자리매김시키고, 1986년 11월에 국철 분할·민영화 관련 8법을 통과시켰다.
그는 전범이 합사된 야스쿠니신사 참배에도 적극적이었다. 1985년 8월 15일 총리로는 전후 최초로 공식 참배를 했다. “총리의 공식 참배는 위헌이 아니다”라는 담화를 발표하면서까지 참배했으나 한국 중국 등으로부터 맹반발을 받자 그 이후로는 참배를 하지 않았다.
한편 나카소네는 사적인 자문기관을 두고 대통령식 톱다운 정치를 지향했고, 미일 무역 마찰을 둘러싼 기자회견에서는 직접 그래프를 보여주거나 수영이나 좌선을 하는 모습을 공개하는 등 퍼포먼스에도 능했다.
정권 말기인 1987년 2월, 재정행정개혁 연장선상에서 매출세 도입 관련 법안을 국회에 제출했으나 중소기업 등의 거센 반발로 해당 안을 폐기했다. 또 교육기본법 개정을 목표로 임시교육심의회를 설치했으나 법안 제출에는 이르지 못했다.
한편 그는 1983년 1월 당시 관계가 껄끄러웠던 한국을 방문해 관계 개선의 길을 열었고, 미국도 방문해 레이건 당시 대통령과 두터운 신뢰 관계를 쌓았다. 두 정상은 서로를 ‘론’과 ‘야스’라 부를 정두로 미일 간 외교의 기반을 닦았다. 1983년 11월 레이건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했을 때는 도쿄 히노데마치에 있는 자신의 별장 ‘히노데산장’에서 접대하기도 했다.
2003년 11월 중의원 선거에서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가 비례대표의 73세 정년제 예외를 인정하지 않아 나카소네는 출마를 포기, 56년에 걸친 정계 인생의 막을 내렸다.
나카소네 전 총리의 별세 소식에 각국에서 애도의 소식이 전해졌다. 로이터통신은 “레이건 전 대통령과의 친분과 과감한 개혁을 실현하기 위해 관료들과 싸웠다”고 평가했다.
중국 국영 TV는 NHK 보도를 인용해 나카소네 전 총리의 사망 소식을 트위터로 전했다. 미국 AP통신은 “제2차 세계 대전 후 정계의 거물이었던 나카소네 전 총리가 사망했다”고 전했다.
미국의 경제 일간 월스트리트저널도 속보로 “나카소네 정권 하에서 일본은 전후 군비를 강화하고 세계 경제에서 미국의 라이벌로 평가받게 됐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