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실장
새삼스럽지 않다. 핵무기를 보유한 나라가 스스로 그것을 되돌린 전례는 없다. 핵은 모든 재래식 무기의 우위를 무용지물로 만드는 비대칭 전력의 핵심이다. 북은 지난 30년 경제 파탄과 수백만 인민이 굶어죽는 고난을 버티면서 핵을 완성하고 고도화했다. 실제로 쓰지 못해도 핵보유국 지위만큼 유리한 협상력은 없고 가장 강력한 위협이다. 3대 세습 김정은 정권을 지키는 확실한 생존무기이기도 하다. 북이 말하는 비핵화는 남한과 국제사회로부터 원하는 것을 챙기고, 또 다른 무엇을 끊임없이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미끼일 뿐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한반도 운전자론’을 지렛대로 김정은과 세 번 정상회담을 가졌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의 두 차례 만남도 이뤄졌다. 거기까지였다. 합의는 휴지조각이고 아무것도 진전된 게 없다.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CVID)’나, ‘최종적이고 완전히 검증된 비핵화(FFVD)’의 목표도 흐지부지다. 김정은은 비핵화의 시늉으로 눈속임해 어떻게든 제재를 풀려 했지만 열쇠를 쥔 미국은 넘어가지 않았다.
문 대통령이 올해 신년사를 통해 다시 ‘평화경제’를 강조했다. 문 대통령은 작년 8·15 경축사에서 평화경제를 내세웠다.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로 남북관계 진전과 경제협력이 속도를 내고 통일을 완성할 수 있을 것”이라며, “서로의 체제안전을 보장하면서 남북이 함께 잘사는 평화경제로 새로운 한반도를 열겠다”고 말했다. 이번 신년사에서는 “남북협력 증진을 위한 현실적 방안을 모색하겠다”고 언급했다. 개성공단과 금강산관광 재개, 접경지역 협력, 남북 간 철도와 도로 연결 등도 거듭 주장하고, 나아가 김정은의 남한 답방까지 거론했다.
‘비핵화’는 단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의도적인 독자 노선의 천명이고, 북핵을 용인하겠다는 위험한 신호로 볼 수밖에 없다. 문 대통령의 북에 대한 구애(求愛)는 끝이 없다. 하지만 그동안 대화와 협력을 말할 때마다 무시당하고, 북이 쏟아낸 수도 없는 조롱과 모욕적인 막말은 옮기기조차 민망하다. 북은 작년 한 해에만 13차례의 초대형 방사포와 미사일 도발을 감행했다. 그런데도 문 대통령은 “한반도에서 전쟁의 먹구름이 물러가고 평화가 성큼 다가왔다”고 강변했다. 과거 천안함 폭침이나 연평도 포격 같은 북의 직접 공격이 없었으니 그게 평화라는 건가?
문 대통령의 평화경제 구상은 원대하다. 남북 간 철도·도로 연결이 핵심이다. 환동해권과 환서해권, 남북 접경지역 등 3대 벨트를 중심으로 ‘하나의 시장’, 동북아 6개국과 미국이 함께 하는 ‘동아시아 철도공동체’를 만든다는 꿈은 장밋빛이다. ‘전쟁불용, 상호 안전보장, 공동번영’의 3대 원칙으로, 남북한과 주변국들이 경제협력을 통해 번영과 평화의 선순환을 이루는 길, 우리의 둘도 없는 희망이자 최선의 미래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 전제가 북의 비핵화다. 북의 핵 포기 없는 평화경제는 본말전도(本末顚倒)의 모래성이다. 무엇보다 경제협력을 통한 공동 번영은 협력 쌍방의 이익이 보장되는 자유거래의 경제원리와 시장경제 질서가 통용되거나 그것을 수용할 수 있는 체제 전환이 뒷받침돼야 한다. 그게 안되면 협력이란 이름의 김정은 통치자금 퍼주기이고, 과거 그랬듯 돈만 갖다 바치면서 평화를 사지 못하는 결과만 가져올 뿐이다. 북한에 대한 본질적인 의구심이다.
북의 핵 포기가 없다면 평화경제론 또한 양립할 수 없는 허상(虛像)이다. 지금 북핵 위협의 최일선에 있는 우리가 앞장서 유엔 제재의 질서를 뒤엎고 국제 공조의 의무와 책임을 팽개치는 경협에 나서겠다고 한다. 정말 이래도 되는 일인가? 핵을 머리에 이고, 북이 책동하는 일상적 위기의 살얼음판에서 대한민국 국민의 생명과 재산의 안전이 위협받아야 하는 치명적 현실이 암담하다.kunny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