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수경 국제경제부장
논란의 주인공인 해리 해리스 주한 미국 대사에 대해 호의적이든 비판적이든 간에 그의 콧수염을 둘러싼 논란은 누가 봐도 기괴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그런가. 지난 주말 사이 해외 언론에서는 해리스 대사의 콧수염 이야기가 화제가 됐다. 16일에 해리스 대사가 외신 기자들을 모아놓고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자신의 콧수염 논란을 하소연한 까닭이다.
그는 기자들에게 “내 수염이 어떤 이유에서인지 여기서 일종의 매혹 요소가 된 것 같다”며 “내 인종적 배경, 특히 내가 일본계 미국인이라는 점에서 언론, 특히 소셜 미디어에서 비판받고 있다”고 주장했다.
해리스 대사는 일본계 어머니와 주일 미군이던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미 해군 태평양 사령관으로 재직하다가 2018년 7월 한국에 미국 대사로 부임했다. 그는 군에 있을 때는 수염을 기르지 않다가 갑자기 수염을 기른 계기에 대해, “외교관의 길로 접어들면서 새로운 삶을 기념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사실, 서양 사람이 수염을 기르는 건 그다지 대수로운 일이 아니다. 대표적인 게, 얼마 전 영국 왕실에서 독립을 선언한 해리 왕자도 덥수룩하게 수염을 길렀다. 재작년에는 미국 남성들 사이에 수염이 유행하면서 면도기 브랜드 질레트가 판매 부진으로 고전하고 있다는 뉴스도 나왔었다.
다만 해리스 대사를 둘러싼 콧수염 논란의 본질은 단순한 콧수염 얘기가 아니다. 해리스 대사는 아직도 그걸 잘 모르는 것 같다.
그가 부임하고 나서 한국과 일본, 한국과 미국 관계는 꼬일 대로 꼬였다. 한일 관계는 일제 강점기 징용공 판결 문제 여파로 악화 일로에 있고, 미국 정부는 연일 한국에 방위비 분담금 인상 압박을 강화하고 있다. 이런 와중에 해리스 대사가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과 관련해 한국 정부에 파기 결정을 번복하도록 압력을 행사했다는 이야기까지 흘러나오면서 미국과 일본 피를 모두 가진 해리스 대사에게로 반미와 반일 감정의 화살이 향했다.
그 화살이 엉뚱하게도 인신공격으로 이어졌는데, 하필 콧수염이다. 콧수염을 기른 그의 외모가 도조 히데키와 아라키 사다오, 하타 슌로쿠 등 일제 강점기 때 한국을 짓밟았던 일본 군인들을 닮았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해리스 대사는 “일제에 저항한 한국의 독립운동가 중 안중근 의사와 안창호 선생도 콧수염을 길렀다”고 했다. 그의 말도 틀린 건 아니다. 그 당시에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그런 모양의 콧수염이 유행했던 것 같다.
외신들은 해리스 대사의 출생 배경과 한일 과거사 등을 예로 들며, 해리스 대사의 콧수염에 대한 한국인의 반감을 이해한다는 뉘앙스로 보도했지만, 일각에서는 인종차별주의로 치부될 수도 있음을 우려했다. CNN은 미국 중앙정보국(CIA) 자료를 인용, “한국은 미국 같은 인종의 다양성이 없는 균질적인 사회다. 다른 인종으로 이뤄진 가정이 드물고, 외국인 혐오 감정은 놀랄 만큼 일반적”이라고. 그러면서 CNN은 한국 사회에 깊이 뿌리내린 인종차별적인 분위기와 무리한 주한 미군 주둔 비용 협상으로 한미 동맹의 미래에 균열이 가고 있다고 우려했다.
그러나 해리스 대사가 자기 자신에 대한 비판을 외신 기자들에게 떠벌려 논란을 키운 점도 없잖아 있다. 이는 2017년 1월, 임기를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간 마크 리퍼트 전 대사와 사뭇 대조된다. 2015년 갑작스럽게 피습을 당해 얼굴에 심한 상처를 입었음에도 그는 한국인을 비난하기는커녕 “같이 갑시다”라는 말로 한국민들에게 감동을 줬었다. 고별 기자회견에서도 “한미 동맹은 역사상 최고의 상태이고, 앞으로도 관계를 강화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며 아쉬워했다.
아무쪼록 이번 해리스 대사의 콧수염 논란은 해프닝으로 끝나길 바라는 바다. 콧수염 문제가 외교 갈등으로 비화한다는 둥 그런 침소봉대는 나오지 말아야 할 것이다. sue68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