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준섭의 중국 경제인열전] 중국 전국시대 최고의 경세가, 관중

입력 2020-01-23 05:00

  • 작게보기

  • 기본크기

  • 크게보기

행정·재정 바로세워 제나라를 패자의 자리에 오르게 하다

관중(管仲)은 BC 723년 지금의 안휘성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관이오(管夷吾)이며, 중(仲)은 자(字)이다. 그의 조상은 본래 희씨(姬氏) 성으로 주(周)나라 왕실과 동종(同宗)이었다. 그의 부친은 대부 벼슬까지 올라간 적도 있었지만, 그 이후에는 크게 몰락하여 관중은 매우 가난한 유년 시절을 보내야 했다.

친구 포숙의 추천으로 제나라 환공의 재상에

하지만 그는 실의에 빠지지 않고 천하를 유력(遊歷)하면서 지식과 경험을 축적하며 때를 기다렸다. 그는 죽을 뻔할 고비도 넘기면서 친구 포숙(鮑叔)의 추천에 힘입어 마침내 제(齊)나라의 재상 자리에 올랐다. 관중은 제나라 환공(桓公)을 보좌하여 제나라가 전국시대(戰國時代) 최초로 패자(霸者)의 자리에 오르도록 한 일등공신이었다.

관중이 제나라 재상의 자리에 올라 정사를 맡은 이후, 바닷가의 작은 나라였던 제나라는 상업이 발전하고 재물이 모아져 국가는 부유하게 되었으며 군사력은 강대해졌다. 그는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항상 백성들과 고락을 함께하였다.

그는 전국적으로 행정제도를 정돈해 사농공상이 각기 그 직업에 본분을 다하도록 하였고, 백성들이 이리저리 유랑하지 않고 한 곳에 정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러한 행정 개혁은 사회의 안정에 그 목적이 있었다. 또한 삼림을 남벌하고 호수를 마르게 하여 고기를 잡는 등 당장 눈앞의 이익만을 위해 임업과 어업 자원을 마구잡이로 훼손하는 당시의 풍습을 금지하고 벌목과 고기잡이를 적절한 계절과 시기에만 허용하도록 하였다. 인류 역사상 최초의 ‘자연환경보호법’이었다.

국가 정책은 반드시 민심에 순응해야

관중의 정책은 이렇듯 평범하고 쉬웠으므로 시행에도 어려움이 없었다. 백성들이 원하면 곧 그것들을 들어주었고, 백성이 반대하면 곧 그것을 포기하였다. 그는 말했다. “창고가 가득 차야 예절을 알고 의식(衣食)이 족해야 영욕을 안다. 반대로 예의염치가 시행되지 못하면 국가는 곧 망하게 된다. 국가의 정책과 조치들이 마치 물 흐르듯 순조롭게 시행되는 것은 그것들이 민심에 순응하기 때문이다.”

관중은 “주는 것이 곧 얻는 것임을 아는 것이 나라를 다스리는 법보(法寶)이다”고 갈파하였다. 그의 정치는 전화위복에 능하여 실패를 성공으로 변화시켰으며, 물가 통제를 중시하고 신중하게 재정을 처리해 나갔다.

구체적 실적에 따라 관리 임명

관중은 환공에게 나라를 다스리는 데는 무엇보다 인재 등용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리하여 관중은 재주 있는 사람이면 언제든지 궁궐에 들어올 수 있도록 하고, 밤마다 궁궐 뜰 앞에 모닥불을 피워 밝혀 놓았다. 그러나 1년이 지나도록 한 명도 찾아오지 않았다. 그렇게 인재가 없을까 하고 환공이 혀를 차고 있을 무렵, 어느 시골에서 온 사람이 드디어 면회를 신청하였다.

환공이 반갑게 맞으며 물었다. “그래, 그대의 재주는 무엇이오?”

그러자 시골 사람이 대답했다. “저의 재주는 구구단이옵니다.”

“아니, 그것도 재주라 할 수 있겠소?” 이에 그 시골 사람이 정색하며 말하였다.

“지금 대왕께서 인재를 구하고 계시지만 1년이 되도록 찾아오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것은 대왕께서 워낙 현명하시기 때문에 누구도 따를 수 없다고 생각해 찾아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저의 구구단은 재주도 아니지만 이 정도의 재주도 대우받게 되면 재능 있는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찾아올 것입니다.”

환공은 “그 말이 참으로 옳다!”라고 말하고는 그를 후하게 대접하였다. 그 후 한 달이 채 못 되어 나라 안의 인재들이 궁궐로 모여들었다.

관중은 나라 안에 있는 인재들을 추천하도록 하여 그들을 과감하게 기용하였다. 그러나 관리를 임명할 때는 겉으로 드러난 형식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구체적으로 나타난 실적에 근거해 이뤄지도록 했다. 특히 백성들의 신임을 얻은 실적이 중시되었다.

▲중국 산둥(山東)성 쯔보(淄博)시에 있는 관중기념관과 관중상(像).

토지 등급 따라 차등적 세금 부과…소금·철 국가전매 ‘국영기업’의 발명자

관중은 토지의 비옥도에 의거하여 세금을 징수하는 ‘상지이쇠징(相地而衰徵)’이라는 토지 세수정책을 만들어 토지의 등급에 따라 차등적으로 세금을 부과하였다. 이는 합리적인 조세부담 정책으로서 백성들의 협력을 이끌어 냈다. 그리고 ‘경중 9부(輕重九府)’를 설치하여 풍년과 흉년에 따라 백성들이 필요한 식량과 물품을 조정하였다. 또 주화를 만들고 어업과 염업을 발전시켰으며 다른 나라와의 무역을 장려하여, 이로부터 제나라 경제는 크게 번영하였다. 그는 호족들이 함부로 백성들의 토지를 빼앗는 것을 엄금하였다.

그의 재산은 왕실 재산과 견주었지만, 사람들은 그를 비난하지 않았다

특히 관중은 중국 최초로 소금과 철의 국가전매 정책을 펼쳐 상업을 크게 발전시켰고, 이러한 관중의 정책 추진에 따라 제나라는 전국시대 초기의 강국으로 우뚝 서게 되었다. 실로 관중은 ‘국영기업’의 발명자였고, 가히 중국 고대 시기 최고의 경세가라 할 것이다.

관중 본인 역시 10분의 3의 시장세(市場稅)를 점유할 수 있게 되어 비록 신하의 지위에 있었지만 오히려 열국(列國)의 어떤 제후보다 더 부유하였다. 그리하여 관중의 재산은 왕실의 그것과 비견될 만하였다. 하지만 백성들은 아무도 그를 사치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관중에 대한 엇갈리는 평가

훗날 공자(孔子)는 관중이 검소하지 않았음을 비판하였다. 또 군주만이 문 앞에 담을 쌓을 수 있는데 관중이 신하로서 문 앞에 담을 쌓은 사실을 지적하며 그의 예의 없음을 비난하였고, 관중의 그릇이 작다며 탄식하였다. 그러나 공자는 그와 동시에 제나라 환공을 천하의 패자로 만든 것은 오로지 관중의 힘이었다고 말하면서 “만약 관중이 없었다면 나 자신도 야만인의 신세를 벗어나기 어려웠을 것이다”라며 그 공헌을 높이 평가하였다. ‘삼국지’에 나오는 제갈공명(諸葛孔明)도 언제나 자신이 관중과 같은 인물이 되고자 노력하였다.

한편 사마천은 공자가 관중을 과소평가하는 점에 대해 “옛말에 ‘군주를 보좌하여 그 미덕을 발양시키고 그의 과오를 바로잡음으로 상하가 곧 서로 가까워질 수 있다’고 했는데, 이런 사람이 바로 관중이 아닌가?”라며 반론을 제기하였다. 사마천은 “연못이 깊어야 물고기가 생기고 산이 깊어야 짐승이 모이듯이, 사람도 부유할 때 비로소 인의가 생겨나는 것이다”고 갈파했는데, 이는 바로 “곡식 창고가 충실해야 사람들은 비로소 예절을 알고, 의식이 족해야 사람들은 비로소 영욕(榮辱)을 안다”는 관중의 관점을 그대로 계승한 것이었다.

관중은 BC 645년에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78세였다. 사후에 그는 관자(管子)라는 존칭으로 불렸다.

  • 좋아요0
  • 화나요0
  • 슬퍼요0
  • 추가취재 원해요0
주요뉴스
댓글
0 / 300
e스튜디오
많이 본 뉴스
뉴스발전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