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주 이익 사이클이 정점에 도달하고 있다. 다음은 가치주 차례다. 과거 시장 주도주는 다음 주도주가 될 수 없다. 주변에서 어떤 자산이 저평가 상태고, 시장의 관심에서 소외됐는지 발굴해야 한다.”
이채원 한국투자밸류자산운용 대표는 3일 여의도 본사에서 이투데이와 가진 인터뷰에서 이같이 말했다. ‘국내 가치투자 1세대’로 꼽히는 이 대표는 저금리, 저성장 국면에서 가치주 시대가 도래할 것을 대비해 다음 투자처를 준비하고 있다.
최근 성장주 중심의 시장은 가치투자자에게 가혹한 시기였다. 변동성이 낮은 종목에 투자해 안정적 수익을 추구하는 소위 로볼(Low Volatility) 전략이 먹혔고, 패시브 펀드 자금도 쏠렸기 때문이다. 성장주로 분류되는 아마존, 구글, 넷플릭스 등 글로벌 소비재 기업이 연일 사상 최고가를 기록한 이유기도 하다.
이 대표는 이 같은 현상으로 미국의 가치주 시장은 더욱 힘든 상황이라고 우려했다. 특히 미국의 가치주와 로볼 간 수익률 괴리는 40년 만에 역대 최고로 벌어진 상황이라고 분석했다. 국내도 비슷한 상황이다. 국내 시장은 미국과 같은 성장주, 플랫폼 기업의 자리를 반도체주, 바이오주가 대신했는데 이마저도 크게 상승하진 못했다고 짚었다.
이 대표는 “과거 ‘닷컴버블’ 당시에도 성장주가 강세를 보였는데, 현재도 비슷한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며 “최근 4차 산업혁명이 이끄는 시대에 저금리 현상이 벌어졌고, 글로벌 성장성 둔화에 따라 다시 가치주 선호로 돌아갈 것으로 보인다”고 전망했다.
통상 성장주의 밸류에이션(내재가치)을 계산할 때 DCF(Discounted cash flow)를 활용한다. 미래의 현금 흐름을 현재 가치로 할인하는 방법인데, 할인에 이자율을 대입한다. 이자율이 낮을수록 밸류에이션이 높게 나오고, 이자율이 높으면 할인율이 커지는 셈이다. 최근 전 세계적으로 금리가 낮다 보니 성장주의 밸류에이션이 높아졌다. 즉 금리가 내리면서 성장주가 상승했지만, 이 역시 사이클의 일환이라는 설명이다.
수익률(yield) 역시 이를 뒷받침한다. 보통 은행, 국고채, 부동산 등에 투자하면 벌어들일 수 있는 수익이 정해져 있다. 주식의 수익률은 당기순이익을 시가총액으로 나누면 된다. 현재 최근 정기예금 금리는 1%대, 국고채 10년 금리는 1.4% 수준이다. 이에 따른 자산 수익과 비교해 주식 수익률이 2%만 나와도 나쁘지 않다는 분석이다.
그는 “더이상 팔 우물이 없다면, 고인 물을 정화해서 마시는 시대가 올 것”이라며 “지금 같은 시대에는 과거의 성장 결실을 일시에 취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날 수 있다”고 언급했다.
한투밸류가 장기간 보유한 기업에 강한 주주환원을 요구하는 이유기도 하다. 지난달 KISCO홀딩스, 넥센, 세방, 세방전지 등에 배당성향 확대, 자사주 소각, 신성장동력 확보 등을 요구하는 주주서한을 보냈다. 주주환원율이 낮아 기업이 저평가됐다면, 이를 개선해 기업가치를 높일 수 있다는 분석에서다. 특히 국내 기업의 주주환원율은 글로벌 대비 압도적으로 낮은 수준으로, 코리아디스카운트의 주요 원인이라고 짚었다.
이 대표는 “주주환원율과 지배구조 개선이 동시에 이뤄진다면 기업 재평가에 분명 좋은 성과가 날 것으로 기대한다”며 “기업의 비재무적 요소를 따지는 ESG 투자 측면에서도 주주들의 요구를 마냥 무시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고 지적했다.
이채원 대표는 앞으로도 충분히 성장할 수 있는 저평가 기업 발굴에 주력하고 있다. 특히 중소형주에 기회가 있다고 강조했다. PER 10배 수준에도 꾸준히 성장하는 기업들이 있다고 말했다. 특히 스스로 기업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비즈니스 모델을 갖고 있으며, 현재 저평가된 성장주를 보유하는 게 전략이라고 조언했다.
이어 이익이 크게 늘지 않지만, 꾸준히 돈을 벌면서 PER이 낮은 기업, 일정한 배당에도 저평가된 기업 등 수익가치주에 주목해야 한다고 전했다. 우량한 유동자산이 풍부한 기업들 역시 시장의 관심에서 소외된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지난해 말 이채원 대표는 겸직하던 최고투자책임자(CIO) 자리를 내려놨다. ‘가치투자 역시 진화한다’는 지론에서다. 과거에는 전통 가치투자 전략에 따라 자산보유 현황에 무게를 뒀지만, 최근엔 비지니스 모델 등을 분석하는 데 공을 들이고 있다.
그는 “지배구조, 사업의 전망, 비즈니스 모델, 경영진, 투명성 등 정성적 부분을 분석하는 것 역시 가치투자의 일환”이라며 “다음 시장의 주도주가 무엇일지 알 수 없기에 끊임없이 공부하고 고민하고 있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