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연휴의 마지막 날 한가로운 오후.
정확히 기억난다.
사수한테서 뜬금없이 전화가 걸려왔다.
“빨리 들어와라(메신저 로그인해라).”
그 짤막한 말에 ‘젠장, 올 것이 왔구나’라고 직감했다. 158년 전통의 미국 대형 투자은행 리먼브러더스가 파산 보호를 신청한 날이었다. 베어스턴스가 무너지고 그 다음은 어디일까 아슬아슬했었다. 패니메이와 프레디맥은 국책은행이니 미국 정부가 구제할 것이고, 남은 건 리먼과 메릴린치인데, 결국 리먼이 먼저 무너진 것이었다.
그해 추석 연휴는 ‘100년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글로벌 금융위기의 시작을 알리는 것으로 그렇게 끝이 났고, 그날부터 우리는 멀미가 날 정도로 속보와의 전쟁을 치러야 했다.
연일 터져 나오는 은행 파산 뉴스에, 속절없이 곤두박질치는 증시를 보고 있자면 극도의 긴장감이 몰려오며 숨이 턱턱 막힐 지경이었다. 2009년 초 시장이 바닥을 칠 때까지 그런 우울한 시대가 이어졌고, 그런 악몽이 다시는 오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런데, 요즘, 그때의 악몽이 되살아나고 있다. 자고 깨면 증시는 널을 뛰고 있고, 경기 침체의 시그널은 점점 선명해지고 있다. 더 두려운 건 이런 상황들이 ‘정.체.불.명’의 전염병(코로나19)에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글로벌 금융위기는 돈으로 해결됐다지만, 이 전염병은 백신이 없는 한 돈도 소용이 없다. 변변치 못한 리더십만 탓할 수 없는 이유다.
세계를 뒤흔드는 위기가 발생할 때마다 총지휘자 역할을 해온 건 미국이었다. 하지만 미국 우선주의를 앞세운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에선 그런 리더십을 기대할 수 없어 보인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 전염병에서 자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주저하지 않을 것이라며 내놓은 대책이 유럽에서 미국으로의 입국을 금지한다는 일방적 통보였다. 전염병 확산을 방지하기 위해 부득이한 결정이었다고는 해도 사전에 상대국과 조율을 거쳐야 하는 게 외교상의 관례일 텐데 말이다.
여기에 트럼프 대통령과 제롬 파월 연방준비제도(Fed, 연준) 의장, 스티븐 므누신 재무장관의 팀워크는 금융위기 당시 조지 W. 부시 대통령, 벤 버냉키 연준 의장, 헨리 폴슨 재무장관에 이은 버락 오바마 대통령, 티머시 가이트너 재무장관, 버냉키 3각 공조와 비할 바가 못 된다. 그때도 위기 대응을 놓고 비판이 거셌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니 차라리 그때가 더 이상적이었다는 생각까지 든다. 미국은 올해 G7 의장국. 내부에서도 엇박자를 내는데, 하물며 다른 강대국들의 결속을 이끌어 낼 수 있을지 미지수다.
하지만, 무슨 일이든 처음은 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도 당시엔 모두에게 처음이었다. 그랬기에 모두가 미숙했고, 그랬기 때문에 시행착오도 겪었다. 그럼에도 결국 그 긴 암흑의 터널에서 빠져나왔다.
이번 코로나19 사태도 우리 모두 처음 겪는 일이다. 발원지인 중국 우한만 봉쇄하면 바이러스 확산이 끝날 줄 알았다. 그래서 우한의 마스크 품귀와 자가 고립, 의료 혼란 상황을 강 건너 불구경하듯 했다. 곧바로 모두의 일이 될 줄도 모르고.
사방이 닫혔다. 마음의 안식처인 종교시설도 문을 닫았고, 시름을 잊게 해 줄 스포츠 경기들도 중단됐다. 여행을 하면 나아질까? 지금 이방인을 환영해줄 나라는 지구촌 어디에도 없다. 심지어 하늘길도 뱃길도 다 막혔다.
이 다음에 역사책에 ‘2020년부터 시작된 새로운 10년은 전염병 창궐과 글로벌 경기 침체로 시작됐다’고 기록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류는 이런 우울 속에서도 희망을 발견하는 법을 알고 있다. 우리나라에선 ‘내일은 미스터트롯’ 같은 경연 프로그램을 통해 갖은 어려움을 딛고 혼신을 다해 노래하는 가수들을 보며 함께 울고 웃으며 응원했다. 이탈리아에선 봉쇄된 도시에서 발이 묶인 이들이 베란다에 나와 ‘안드라 뚜또 베네(모든 게 잘 될 거야)’라며 서로를 격려한다. 스위스에선 세계보건기구(WHO) 직원들을 향해 응원의 경적이 울린다.
이번 위기 또한 지나갈 것이다. 10여 년 전 그때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