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지 언니 엠마 보든 役…“목이 허락하는 한 무대 오르고파”
한국 뮤지컬계에서 자신만의 영역을 차근차근 구축하고 있는 배우가 있다. 뮤지컬 ‘이블데드’, ‘루드윅’, ‘블루레인’에서 실력을 입증받더니 최근 막을 내린 ‘미스트’에선 조선의 마지막 칙서를 들고 문밖으로 나서는 주체적인 여성인 나혜인 역을 소화해내 뮤지컬 팬들의 지지를 받았다. 배우 김려원은 지금 뮤지컬 ‘리지’에서 리지 언니 역으로 또 한 번 ‘덕후 몰이’에 나섰다.
최근 서울 대학로에서 만난 김려원은 여성 배우 4인으로 구성된 ‘리지’에 대한 애정을 아낌없이 표현했다.
“여성들만 나오는 뮤지컬을 해보고 싶었는데, 대본을 받게 돼서 정말 좋았어요. 설레고 기대됐죠. 바라던 일들이 이뤄졌거든요. 연습실 분위기도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최고예요. 서로 격려하면서 하고 있어요.”
‘리지’는 1892년 미국에서 일어난 미제 살인 사건 ‘리지 보든 사건’을 모티브로 한다. 1990년 4곡 실험극으로 시작돼, 20년간 작품 개발을 통해 2009년 뉴욕 오프브로드웨이 초연 이후 미국과 유럽 등에서 호평을 받았다.
미국 매사추세츠 폴 리버의 보든 가(家) 둘째 딸 리지는 친부와 계모를 살해한 유력한 용의자로 체포되지만 치열한 재판 끝에 무혐의로 풀려난다. 이 사건은 100여 년간 미국에서 가장 미스터리한 살인사건으로 남았고, 책, 연극, 드라마, 영화 등 다양한 콘텐츠로 제작됐다. 미국에선 ‘흥부 놀부’나 ‘장화 홍련’처럼 잘 알려진 이야기지만, 우리나라에선 낯선 이야기다. 국내에선 초연이다.
“처음 악보를 받아들었을 땐 우리나라 정서상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어요. ‘왜 이렇게 전개된 것인가’ 싶었고, 해소가 되지 않았죠. 연출진과 배우들이 함께 배우가 느끼기에도 납득할 수 있고, 관객도 공감할 수 있도록 계속 고쳐나갔어요. 지금은 정말 재밌어졌어요. 원작은 개인적인 성향이 강한 나라여서인지 캐릭터들의 각자 플레이가 많았는데, 저희는 같이 가도록 만들었어요. 특히 리지가 판결을 받는 장면에서 배우들의 액션이 극대화됐죠.”
‘리지’는 여성이 저항하고 자유를 찾아간다는 메시지를 던진다. 가부장 체제 아래에서 자신을 둘러싼 폭력과 억압에 저항하는 여성들의 이야기가 강렬한 록 음악과 어울려 펼쳐지니, 관객에게 전해지는 효과는 배가된다. “머리가 왜 없어?”, “썸바디, 누가 사고쳤어” 등의 가사는 귀에 꽂힌다. 커튼콜에서 4명의 배우가 뮤지컬 넘버를 부를 때면 콘서트장에 온 것만 같다.
특히 ‘리지’의 개막 시점이 ‘N번방 사건’과 맞물리게 되면서 화제를 모았다. 김려원은 최근 ‘N번방 사건’과 관련해 국민청원 참여 화면을 SNS에 게시하며 해당 사건에 대한 강력 처벌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높인 연예인 중 한 명이다. 김려원은 “여러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라며 “여자들이 자책하지 않았으면 한다”고 했다.
“‘리지’는 아버지에게 성적으로 학대받은 자매 이야기인데, 처음 대본만 봤을 때 아버지를 신고해서 잡혀가게 하지 않고 직접 살해하는 게 이해하기 어려웠어요. 하지만 극이 만들어지고, 배우들이 잘해내니 저도 감정이입이 잘 됐어요. 처음 ‘런’을 돌 땐 눈물이 나고 가슴이 아팠어요. 아빠가 직접 나오지도 않지만, 리지가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좌절하지 않는다’고 소리치는 모습을 보면서 공감대 형성이 됐죠.”
김려원은 28살이었던 2014년 뮤지컬 ‘셜록홈즈’ 앙상블로 뮤지컬배우로 데뷔했다. 디지털 싱글 앨범도 내고, '음악 축제' 등을 통해 무대에 오른 경험은 있지만, 정식 데뷔작은 ‘셜록홈즈’다. ‘리지’ 연습실에서 김려원의 별명은 ‘반복이’다. 관객에게 좋은 공연을 보여주겠다는 마음으로 연습하고 또 연습하는 모습을 보며, 리지 역의 나하나가 붙여줬다.
“‘젊음의 행진’에선 ‘한 번만 더 반주를 틀어달라’고 계속 말해서 동생들이 부담을 받았나 봐요. 우스갯소리로 제가 계약하면 안 하겠대요. 요즘은 최대한 덜 하려고 하는데도, ‘반복이’가 됐어요. 제가 못하면 관객을 비롯해 모두에게 피해가 갈 거라는 생각때문에 하게 돼요. 어쩔 수 없어요.”
‘믿고 보는 김려원’이라는 수식어까지 붙었지만, 김려원은 여전히 목마르다. “저는 정도 많고 욕심도 많아요. 공연 안 하고 어떻게 살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때로는 오디션 보는 게 너무 무서워서 이렇게 치열하게 살아야 하나 싶기도 하지만, 공연하는 게 좋아서 버티고 있어요. 제 목이 허락하는 한 계속 공연하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