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실장
중국을 섬기고 일본·미국과 연대해야 한다는 ‘친중(親中)·결일(結日)·연미(聯美)’가 핵심이다. 조선에 일본과 미국을 끌어들여 러시아의 남진을 막겠다는 중국의 속셈이기도 했다. 1880년 일본에 수신사로 파견된 김홍집이 이 책을 가져와 고종(高宗)에게 바쳤다. 그러나 조정은 나라를 지킬 힘도 책략도 없었고, 시대와 거꾸로 간 위정척사(衛正斥邪) 논쟁에 묻혀 분열했다. 근대화는 실패했고,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위기를 자초한 나라 운명은 국권을 일본에 뺏기는 치욕이었다.
미국과 중국이 1979년 수교 이후 최악의 대립으로 치닫고 있다. 살벌하고 원색적인 언사로 서로를 깎아내리는 양상은 총성 없는 전쟁이다. 코로나19 사태의 책임을 묻고 중국 때리기에 나섰던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중국과의 모든 관계를 단절할 수 있다”고 공격했다. 나아가 중국을 “또라이, 악랄한 독재정권”이라고 비난했다. 중국은 트럼프를 향해 “완전히 미쳤다”며, 미국이 세계평화의 공적(公敵)이라고 맞받았다. 미 백악관은 의회보고서에서 “중국은 생명과 자유에 대한 미국의 기본신념을 흔드는 정책을 추진한다”며, 압박과 봉쇄 등 ‘경쟁적 접근’에 나설 것을 천명했다. 지난 40여 년 양국이 이처럼 각을 세우고 파열음을 낸 적은 없다.
미국 외교전문지 포린폴리시는 “대결별(Great Decoupling)이 다가왔다”고 진단했다. 트럼프의 ‘경제번영네트워크’(EPN:Economic Prosperity Network) 구상도 나왔다. 미국이 동맹들과 반중(反中)의 배타적 경제블록을 만들어 글로벌 공급망을 재편하겠다는 것이다. 그동안의 유화정책을 폐기하고, 중국을 세계시장에서 고립시킨다는 전략이다. 미국 파트너들은 유럽과 일본, 인도, 호주 등이다. 한국도 당연히 그 대상이다.
중국은 미국이 주도했던 자유무역 질서를 통해 경이적 경제성장을 이루고 미국에 비견되는 초강대국에 올라섰다. 그리고 시진핑 집권 이후 중국몽(中國夢)을 내세워 패권을 추구한다. 돈의 힘으로 벌인 일대일로(一帶一路) 프로젝트로 글로벌 영향력을 확대하는 데 그치지 않고, 대만과 남중국해에 군사적 위협까지 가하면서 영토적 야심까지 노골화하고 있다.
미국은 마침내 이 도전을 용납하지 않겠다고 나섰다. 트럼프의 중국 공격은 대통령 재선을 위한 돌출행동도 아니다. 결국 터지고 말 일이었다. 시진핑에 대한 거부감, 중국의 패권주의를 강력히 견제해야 한다는 미국 조야(朝野)의 입장과 리더십의 방향은 다르지 않다.
미국의 구도는 글로벌 시장경제 체제에서 중국을 내모는 데 있다고 봐야 한다. 중국 경제를 대폭 후퇴시키고 힘을 꺾어 더는 패권의 꿈도 꾸지 못하게 주저앉히는 것이다. 지금 아니면 기회가 없다고 판단한 것 같다. 2018년 무역분쟁으로 불을 붙였다. 안보 차원의 반도체 공급 금지로 화웨이를 퇴출시키려는 캠페인도 예고편이다. 홍콩 민주화 이슈 또한 화약고다.
미국의 작심한 공격을 중국은 감당하기 힘들다. 중국 경제는 이미 글로벌 시장체제에서 격리돼 독자생존할 수 없을 만큼 고도화된 자본주의로 이행돼 있다. 경제력과 군사력 모두 미국과 맞서기에 역부족이다. 중국의 후퇴는 한국 경제의 악몽이다. 미국의 EPN 구상은 한국에 양자택일의 선택을 강요한다. 미국에 안보를, 중국에 경제를 의존하는 안미경중(安美經中) 구도가 뿌리째 흔들린다. 우리가 어떤 가치를 우선해야 하는지 선택지는 달리 없는 냉엄한 현실이다.
한국 안보와 경제의 두 축이 충돌하는 가장 난감한 딜레마다. 세계화의 흐름이 끝나는 조짐이다. 구(舊)소련 붕괴 이후 새로운 냉전시대로의 회귀다. 최악의 상황이 현실화할 때 우리가 움직일 공간이 있는가? ‘전략적 모호성’으로 포장한 빈약한 외교력으로 중립을 지키는 게 가능한가? 국익과 실리를 위한 균형외교를 말하지만 우리에게 어떤 선택의 지렛대가 있는가? 경제의 방향성은 무엇을 향하고 있는가? 미래가 보이지 않는 엄중하고 심각한 위협에 직면해 있다. 자강(自强)의 힘과 책략의 결핍이 나라를 위기에 몰아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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