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이펙트②-1“기존 패권국과 급부상 신흥 강대국 충돌할 수밖에 없어”…코로나19 ‘비난 게임’ 속 노골적 패권 전쟁
미국 하버드대 석좌교수인 그레이엄 앨리슨은 2017년 저서 ‘예정된 전쟁’에서 2500년 전 고대 그리스 역사학자인 투키디데스에서 비롯된 ‘투키디데스 함정’이 향후 미·중 관계를 파악하는 핵심 키워드가 될 것이라고 진단했다.
투키디데스는 ‘펠레폰네소스 전쟁사’의 저자로, “전쟁이 필연적이었던 것은 아테네의 부상과 그에 따라 스파르타에 스며든 두려움 때문이었다”고 기술했다. 저명 정치학자인 앨리슨은 여기에 영감을 얻어 “기존 패권국가와 빠르게 부상하는 신흥 강대국은 결국 충돌할 수밖에 없다”며 이를 ‘투키디데스의 함정’이라고 정리했다.
앨리슨은 2012년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에 기고한 글에서 미·중 관계가 향후 어떻게 전개될지 알 수 있는 핵심 단어로 ‘투키디데스 함정’을 처음 언급했다. 2017년 저서는 이를 구체적으로 풀이한 것이다.
명쾌한 앨리슨의 정의에 감명을 받았던 것일까. 홍콩 영자지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에 따르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2012년 이후 최소 세 차례나 이 단어를 언급했다. 그는 2013년 서구권 인사들과의 회동에서 “미·중은 투키디데스의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함께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2017년 1월 세계경제포럼(WEF, 일명 다보스포럼) 연설에서도 “미·중이 의사소통을 유지하고 서로를 성실하게 대우하는 한 투키디데스 함정을 피할 수 있다”고 말했다.
올해 초만 해도 양국이 투키디데스 함정에 빠지는 것을 최소한 지연시킬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다. 1년 반 동안 무역전쟁을 벌인 끝에 극적으로 1단계 무역합의문에 서명한 것이다.
그러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모든 것을 뒤바꿔놓았다. 미·중은 힘을 합쳐 세계 경제활동을 전면적으로 중단시킨 대재난에 맞서기보다는 서로에 대한 ‘비난 게임’에 열을 올리면서 패권 다툼을 더 노골적으로 벌이게 된 것이다.
베이징대학 국제전략연구소의 왕지쓰 소장은 “파괴적인 코로나19 팬데믹(전염병 대유행)은 미·중 관계를 전면적 대결 국면으로 몰고 갔다”며 “양국은 전반적인 경쟁에서 타협이나 조정 여지가 전혀 없는 전면전으로 전환하고 있다. 투키디데스 함정에 빠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지난달 26일(현지시간)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인민해방군 및 무장경찰 인민대표들과의 회의에서 “홍콩에 대한 내정간섭을 절대 용납할 수 없다”며 “군은 최악의 시나리오에 대비해 실전에 버금가는 훈련과 전투준비 태세를 갖춰야 한다”고 주문했다. 그는 지난 4월 8일에도 “전례 없는 외부 역경과 도전에 맞서 최악의 시나리오에 대비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시 주석이 경고한 ‘최악의 시나리오’에 대해 중국 국가안전부 산하 싱크탱크인 중국현대국제관계연구소(CICIR)가 단서를 내놓았다. 최근 보고서에서 “1989년 톈안먼 사태 이후 최악의 반중(反中) 정서를 보이는 미국과의 무력 대결에 대비할 필요가 있다”고 명시한 것이다.
아직 직접적인 무력 충돌 가능성이 작다 하더라도 양국은 이미 무역과 자본시장, 인권 등 다양한 분야에서 갈등을 고조시키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홍콩 국가보안법(홍콩보안법)’의 전인대 통과를 이유로 지난달 29일 “홍콩에 부여한 특별지위 박탈 절차에 착수했다”고 밝혔다. 그는 1차 미·중 무역합의를 언급하지 않았지만, 시장에서는 홍콩과 대만 등 지정학적 위기에 합의가 깨질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있다.
또 미국 정부와 의회는 자국 증시에 상장된 중국 기업들을 상장 폐지할 수 있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중국 정부는 14차 5개년 계획(2021~2025년)을 현재 수립하는 중인데 SCMP에 따르면 미국과의 디커플링(탈동조화)을 염두에 두고 기술과 수출에서 미국 의존도를 줄이고 내수 비중을 높여 자력갱생하는 방안에 중점을 둘 것으로 보인다.
양국의 기술패권 전쟁도 더욱 격화할 전망이다. 독일외교협회의 요세프 브라무어 미국 전문가는 독일 공영방송 도이체벨레(DW)와의 인터뷰에서 “코로나19는 두 세계 강대국 사이의 경제와 지정학적 경쟁을 가속화하고 강화했다”며 “양국은 전 세계 무역과 금융, 데이터 흐름을 통제하기 위해 경쟁하고 있는데 마지막 데이터가 가장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데이터 흐름을 장악하기 위한 양국 경쟁의 대표적인 사례로 중국 화웨이테크놀로지를 꼽았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은 올해 2월 뮌헨안보회의에서 “화웨이와 다른 중국 국영 기술업체는 트로이의 목마와 같다”며 “중국 스파이들이 새로운 디지털 경제의 중심에서 화웨이의 5G망에 설치된 백도어를 통해 서구 데이트 흐름에 무단으로 접근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미국이 지난달 중순 화웨이에 대한 수출 금수 조치를 강화하자 같은 달 21일 시진핑 주석은 “향후 6년간 5G망과 인공지능(AI) 등 첨단기술 개발에 10조 위안(약 1700조 원)을 쏟아부을 것”이라며 맞받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