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중반 이후 지난 270여 년의 기술혁신과 사회변화라는 거대한 역사의 변곡점마다 대학의 한 발 앞선 변화가 있었다. 18세기 중반에는 영국의 글래스고 대학이, 19세기 말에는 미국의 MIT가 그리고 20세기 중반에는 스탠퍼드 대학이 그 변화의 주인공이었다.
◆대학 벤처의 기원, 영국 글래스고 대학과 제임스 와트
영국 산업혁명의 주역인 제임스 와트도 그의 청년 시절에는 오늘날의 청년과 마찬가지로 일자리를 찾기 위해 거리를 헤매고 다녔다. 당시의 장인들은 와트의 재능은 인정하면서도 그가 도제 수업을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일자리를 내어 주지 않았다. 실의에 빠진 와트에게 꿈과 희망을 준 것은 글래스고 대학이었다. 글래스고 대학은 와트의 비범한 능력을 알아보고 과감히 그에게 연구실을 내주었다. 중세의 대학이 외부인에게 이런 배려를 한 것은 당시의 관습을 뛰어넘은 파격적 조치였다.
오늘날로 치면 와트와 글래스고 대학은 대학 벤처의 시조인 셈이다. 글래스고 대학에서 사업의 틀을 잡은 와트는 이후 증기기관 특허를 받고 ‘볼튼 앤 와트 회사’를 설립하여 산업혁명의 불씨를 지폈다. 지난해 글래스고 대학교 공과대학은 ‘제임스 와트’ 공대로 간판도 아예 바꾸어 달았다. 4차 산업혁명 초입에서 와트 DNA를 본격적으로 찾고 키우겠다는 뜻이다.
◆새로운 학문 개척의 선구자 미국 MIT, 전기공학에서 출발
1882년 9월 4일, 에디슨이 뉴욕의 368개 건물에서 8,117개의 전구에 불을 밝히자 MIT는 세계 최초로 ‘전기공학’ 커리큘럼을 도입했다. 당시 전기 산업은 학문적 토대가 취약한 가운데 에디슨의 개인 역량으로 막 태동하던 시기였다. MIT는 지금이야 세계가 부러워하는 공과대학의 대명사이지만 당시는 미국의 수많은 대학 중 하나에 불과했다.
MIT가 전기공학 커리큘럼 과정을 도입하고 10년이 지났을 때 졸업생의 27%가 전기공학도였다. 이들 인력이 전기 산업의 초석을 다지고 ‘전기’로 대표되는 미국 산업혁명의 지평을 넓혀갔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전기 산업은 에디슨이 창조했지만, 전기공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을 연 것은 MIT였다. 새로운 산업에 필요한 학문을 빠르게 수용하고 변화에 민감하게 대응하는 MIT의 학풍은 이때부터 자리 잡았으며 이 학풍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미국 스탠퍼드의 ‘벤처 학풍’, 터먼 교수가 주인공
실리콘 밸리 신화를 연 주인공을 단 한 명만 꼽으라면 아마도 스탠퍼드 대학교의 프레더릭 터먼 교수일 것이다. 1920년 중반 터먼 교수가 부임할 당시 대학 주변은 과수원이 전부였고 학생들은 졸업 후 일자리를 찾아 동부로 떠났다. 1929년 대공황이 시작되고 일자리가 턱없이 부족해지자 터먼 교수는 기술창업이 해법임을 내다보고 제자들에게 기업가 정신을 불어 넣기 시작했다.
터먼 교수의 지도를 받은 휴렛과 팩카드는 훗날 HP를 창업했으며 이 기업은 오늘날 실리콘 밸리의 전설로 회자되고 있다. 터먼이 부총장이 되자 스탠포드 대학 전체에 변화의 바람이 거세게 불기 시작했다. 그는 대학 내부에 과학단지를 조성하여 기업 연구소를 끌어들여 새로운 산학협력의 모델을 제시했다.
또한, 기업가 양성을 위한 창업교육 과정을 선구적으로 개설하는 등 학교 전체에 ‘벤처 학풍’을 조성하기 시작했다. 터먼이 만든 ‘벤처 학풍’ 속에서 스탠퍼드의 졸업생들은 구글, 나이키, 야후, 네플릭스 등을 창업했다. 2011년 기준으로 스탠포드 대학에 뿌리를 두고 있는 기업은 39,900개 이르며 이들 기업의 경제적 가치는 세계 10위권 기업의 경제적 규모와 맞먹을 정도라고 한다.
◆KAIST, 대학 벤처의 새로운 모델을 보여주기를 기대
미국 스탠퍼드 대학교의 터먼 부총장과 예사롭지 않은 인연을 가진 대학이 한국의 KAIST이다. 이 학교 캠퍼스 중앙의 1층 창의학습관에는 터먼 부총장의 이름을 딴 ‘터먼 홀(Terman Hall)’이 있다. ‘터먼 홀’의 의미는 아마도 KAIST가 한국 벤처의 산실이 되어야 한다는 꿈을 상징하는 것일 터이다.
이 꿈은 1990년대 벤처 1세대가 나타나면서 현실이 되었다. 넥슨, 해커스 랩, 네오위즈, 아이디스 등의 창업주가 모두 KAIST 출신이다. 이들의 또 다른 공통점은 학생 시절 모두 이광형 부총장의 지도와 권유를 받아 창업했다는 점이다.
이 부총장은 최근 모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예전처럼 창업에 도전하는 학생이 많지 않다’며 우려를 표했다. 또 그는 ‘KAIST가 끊임없이 개혁해야 하며 개혁이 성공하면 다른 학교와 사회 전체로 확산해야 한다’고 말했다. 필자는 KAIST의 개혁과 역할론에 공감한다.
지금 우리는 코로나 역병에 움츠리고 있으나 이 역병은 언젠가는 사라질 것이다. 역병이 사라질 즈음 KAIST 학생들의 창업도 활기를 찾았으면 한다. 이를 위해 KAIST가 서둘러 변화를 추구하고 그 목표와 방향은 대학 벤처의 부활이 되었으면 한다. KAIST 발(發) 대학벤처가 번성하면 다른 대학에도 그 기운이 퍼질 것이고 이들이 하나 둘 성공하면 좋은 일자리가 생겨날 것이다. 4차 산업혁명이라는 거대한 파고와 마주한 이 시점에 KAIST가 다시금 ‘터먼 홀’의 의미를 되새겨 대학벤처의 허브로 멋지게 변해주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