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Z세대 잡아야 산다” 기업들 생존 경쟁
#고등학생 유모(17) 양은 지난달 몇 달 치 용돈을 모아 50만 원대 ‘메종 마르지엘라’ 티셔츠를 샀다. 제품은 즐겨 보는 유튜버 하울(haul·상품 리뷰) 영상에서 찾았다. 구매는 온라인에서 최저가를 찾아서 했다.
“학생 신분에 사치 아니냐”는 부모님 말씀에는 당당하게 반기를 든다. 마음에 안 드는 저렴한 옷을 여러 벌 사는 것보다, 비싸더라도 마음에 쏙 드는 한 벌을 사는 게 오히려 현명한 소비라는 것이다.
#대학생 이모 씨(24)는 최근 ‘비건(채식) 식품’ 쇼핑에 빠져 있다. 일주일에 두세 번은 비건 식단을 실천한다는 목표를 지키기 위해서다. 대체육부터 채소만으로 맛을 낸 카레, 소에서 고기를 제거한 만두 등 선택지도 좁지 않다. 가격은 일반 식품보다 높지만, 신념을 지키기 위한 비용이라고 생각하면 비싸다고 느껴본 적은 없다.
Z세대(1995∼2004년생) 소비 방정식이 산업 판도를 빠르게 바꿔놓고 있다. 이들은 태어나면서 디지털 기기를 접한 첫 세대라는 점에서 앞 세대인 밀레니얼(1980~2000년생)과도 명백히 다른 특성을 보인다.
글로벌 컨설팅기업 맥킨지가 하반기 내놓은 ‘무엇이 아시아 Z세대를 특별하게 하는가’라는 제목의 보고서에서도 이러한 특징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6개국 1만6000명을 연구 대상으로 삼아 쓴 보고서에선 Z세대의 가장 큰 특징으로 세 가지를 제시한다.
구매 결정부터 결제까지 온라인에서 이뤄지는 빈도가 높고, 자신의 개성을 드러낼 수 있으면서도 품질이 보장된 브랜드를 선호한다. 신념을 위한 ‘가치 소비’를 지향한다.
흥미로운 점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코로나19) 사태 이후 기업들이 ‘Z세대 잡기’에 더 열정적으로 뛰어들고 있다는 것이다. 비대면이 새로운 규범으로 자리 잡을 포스트 코로나 시대, 온라인 소비가 익숙한 Z세대에 집중해야 길게 생존할 수 있다는 판단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신세대 취향과 특성 변화가 곧 미래 산업 지형도가 되기 때문에 기업들은 트렌드 조사 등을 통해 흐름을 읽으려고 늘 시도한다”라며 “다만 코로나19를 기점으로 Z세대에 유독 시선이 몰리고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도 전염병 사태가 마무리돼도 소비자들이 이전과 같은 소비패턴으로 돌아가지는 않을 것이라고 본다. 김시월 건국대 교수는 “코로나19가 잠잠해진다 해도 오프라인 소비 비율이 이전과 같이 복원되기는 어렵다고 본다”며 “특히 2030세대 내에서 비대면 소비로의 전환은 주요 흐름이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가장 대표적인 ‘Z세대 잡기’ 기업 행보로는 온라인 마케팅이 꼽힌다. 오프라인을 기반으로 진행되던 사업들조차도 가파른 산업지형 변화 속도에 마음을 바꿨다.
일례로 온라인과는 거리가 멀던 명품 브랜드는 최근 주요 고객으로 떠오른 Z세대를 염두에 두고 관련 시장에 공격적으로 진출하고 있다.
롯데·현대·신세계 등 주요 백화점은 일명 ‘라방’(SNS 라이브방송)을 통해 소비자를 끌어 모으고 있다. 구찌, 샤넬 등은 네이버 브랜드스토어, 카카오톡 선물하기 등 소비자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IT플랫폼에 자리를 잡았다.
오프라인 위주던 전자업계도 온라인 전환에 적극적이다. 삼성전자는 스마트폰 신제품을 공개하는 ‘언팩’ 행사를 하반기 들어서만 세 번 개최했다. 매년 진행해 오던 ‘갤럭시 팬파티’까지 온라인 전환했다. 소비자 반응도 좋다. 갤럭시 노트20을 공개했던 첫 온라인 언팩 행사 때는 역대 최다 규모인 약 5600만 명의 시청 인원이 몰렸다.
주로 B2B 사업을 영위하는 SK하이닉스도 온라인 기업광고로 시선 사로잡기에 나섰다. 반도체를 의인화한다는 기발한 발상이 포인트다. 비대면 시대, 반도체가 최종 소비자들의 삶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집중적으로 조명했다.
Z세대에게 인기가 좋은 ‘밈’(온라인에서 패러디되는 유머 콘텐츠)을 전면에 앞세운 마케팅도 눈에 띈다.
올해 중순 소셜미디어를 뜨겁게 달군 ‘1일 1깡’의 주인공 가수 비를 내세운 ‘새우깡’ 광고, 16년 전 네티즌과 한 약속을 지킨다는 콘셉트인 켈로그 ‘파맛첵스’ 출시, 드라마 야인시대에서 인기를 끌었던 배우 김영철과 명대사 ‘사딸라’를 패러디한 버거킹 광고 등이 대표적이다.
이는 Z세대가 단순히 콘텐츠를 소비하는 것뿐 아니라, 재생산하고 널리 공유하는 주체라는 점을 의식한 선택이다.
Z세대에게 광고는 ‘SKIP‘ 버튼을 눌러 제거해야 할 대상이지만, 밈이 잘 접합된 광고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웃기거나 영감을 준다면 Z세대는 광고더라도 개의치 않고 그들만의 놀이판인 SNS에 퍼 나르고 재창조한다. 구매로 이어지는 데도 큰 거부감이 없다.
맥킨지는 Z세대에 접근하는 방법으로 ‘영상 콘텐츠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Z세대는 유튜브나 틱톡과 같은 플랫폼에서 다른 세대보다 훨씬 더 많은 영상을 본다”라며 “그들에게 유익하거나 재밌는 영상 콘텐츠를 제공한다면 효과적으로 공유될 가능성이 커진다”라고 했다.
사회적으로 민감한 이슈에는 침묵하라는 공공연한 철칙도 깨졌다. Z세대에서 ‘미닝아웃’(소비 활동을 통해 신념과 소신을 드러내는 것) 소비가 활발하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글로벌 기업에서 뚜렷이 나타난다. 나이키는 하반기 들어 미국 내 인종차별을 반대한다는 의미에서 브랜드 슬로건(Just Do It)을 패러디 한 ‘하지 마!’(Don’t Do It)라는 문구로 광고영상을 제작했다. 아디다스도 나이키의 트윗을 공유하면서 흐름에 동참했다. 나이키를 비롯한 스포츠 브랜드는 주요 소비자가 1020층으로 Z세대와 정확히 부합한다.
국내 기업도 다양한 부문에서 이러한 흐름에 대응하고 있다. 오뚜기, 롯데제과, 신세계푸드 등을 비롯한 식품 기업은 최근 비건 인구를 사로잡기 위해 올해 관련 신제품을 연달아 내놨다. 기후변화가 화두가 되면서 플라스틱 제품을 줄인 친환경 패키징 제품도 업종을 가리지 않고 출시되는 추세다.
김민정 숙명여대 교수는 “Z세대는 윤리적 소비를 함으로써 사회적인 현상에 기여하고 있다는 데서 다른 세대보다 큰 효용감을 느끼는 것 같다”라며 “학생이나 사회초년생 특성상 많은 금액을 소비에 쓰진 못하지만, 한정된 자원 안에서 사회를 바꿔 가는 데 기여하는 걸 선호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