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정규직·중소기업 취업하면 평생 저축해도 내집마련 못해… 결국 대기업·공무원 취직 올인
통계청의 ‘청년층 부가조사’ 결과를 보면, 5월 청년층(15~29세) 인구는 2006년 989만4000명에서 올해 893만4000명으로 96만 명(10.7%) 줄었지만, 일반기업체와 언론사·공영기업체, 일반직공무원 취업시험 준비생은 35만7000명에서 53만8000명으로 18만1000명(50.7%) 늘었다. 중소기업은 외면받는다. 중소기업중앙회가 7월 7일부터 20일까지 청년구직자 700명을 대상으로 시행한 인식조사 결과에 따르면, 중소기업 취업 의향이 있는 응답자는 38.6%에 불과했다.
글로벌 금융위기(2008년) 전후 사회생활을 시작한 30대는 당시 얼어붙은 취업시장에서 눈높이를 낮춰 중소기업·비정규직 등에 취업했지만, 대가는 고용 불안이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세가 진정되면서 경기가 회복 기미를 보였던 8월 초·중순에도 20대 후반(25~29세)과 30대 취업자는 각각 8만4000명, 23만 명 감소했다. 고용률도 3.5%포인트(P), 1.6%P 내렸다. 30대는 외환위기(1998년) 세대인 40대와 함께 노동시장의 취약계층이 됐다.
◇청년은 그대로… 변한 건 노동시장 = ‘586’으로 대표되는 한국의 주류 세대는 한 방에 집착하지 않아도 됐다. 중소기업에 입사해도 대기업으로 이직할 수 있었고, 월급이 적어도 저축만 부지런히 하면 목돈을 만들 수 있었다. 대·중소기업 간 임금 격차가 거의 없고, 연간 임금 상승률과 예적금 금리가 두 자릿수에 달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저축만 성실히 해도 ‘내 집 마련’이 가능했던 게 1980~1990년대다.
그런데 외환위기(1998년)를 계기로 대·중소기업 관계가 원·하청 관계로 고착화했다. 노동시장에선 이동 사다리가 끊겼다. 고용노동부 사업체노동력조사에 따르면, 1993년 1.1배였던 300인 이상 사업체와 미만 사업체의 임금(정액급여) 격차는 지난해 1.4배로 벌어졌다. 1993년은 586세대의 막내가 사회에 진출하기 시작한 시기로, 이때만 해도 대·중소기업 이동이 수월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사업체 규모와 종사상 지위는 노동시장에서 신분제로 굳어졌다.
이로 인해 노동시장엔 보이지 않는 장벽이 생겼다. 한국은행이 2018년 발표한 ‘노동시장의 이중구조와 정책대응’ 보고서를 보면, 300인 미만 사업체 근로자가 1년 후 300인 이상 사업체로 이동하는 비율은 2004~2005년 3.6%에서 2015~2016년 2.0%로 낮아졌다. 비정규직에는 더 가혹했다. 같은 기간 비정규직의 1년 내 정규직 전환율은 15.6%에서 4.9%로 하락했다.
그나마 이뤄지는 대기업 이직, 정규직 전환에 대해선 공정성에 대한 회의가 만연하다. 이런 회의에서 나온 표현이 이른바 ‘될놈될(될 사람만 된다)’이다.
중소기업에서 자아실현이나 경력개발을 기대하기도 어렵다. 한국경제연구원이 2015년 발표한 ‘우리나라 기업의 역동성 저하 점검’ 보고서를 보면, 2000년 존재기업 30만7543개 중 2012년까지 생존한 기업은 7만7194개(25.1%)에 불과했다. 근로자 300명 미만 중소기업 중 1000명 이상 대기업으로 성장한 기업은 단 2곳뿐이었다. 기업의 성장 사다리도 끊긴 상황이다.
◇중소기업 취직 선배도 “오지 마라” = 정보영 청년유니온 정책팀장은 “지금은 불안정한 일자리에 들어가면 경기가 회복됐을 때 좋은 일자리로 갈 수 있는 시스템이 아니다”며 “거기에 계속 머물 가능성이 크고, 경기가 회복돼도 신규 취업준비생들에게 밀릴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특히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외환위기, 금융위기(2008년) 때 비정규직·중소기업에 취업했던 사람들이 해고되는 상황을 목격하고 있다”며 “늦어지더라도 좋은 직장에 들어갈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일찍이 중소기업에 취업한 선배들조차 청년들에게 중소기업 취업을 만류한다.
5년간 중소기업에 다니다가 최근 중견기업으로 이직한 박동민(35·남·가명) 씨는 “흔히 임금이나 야근 이야기를 많이 하지만, 이건 여러 가지 문제 중 일부일 뿐”이라며 “가장 큰 문제는 시스템이 없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많은 중소기업이 가족 중심으로 운영돼 직원들이 사장 가족의 머슴처럼 대접받는 경우가 많다”며 “그게 아니라고 해도 설계에서 제조, 검수까지 한 명에게 떠넘기고, 약속된 근로조건도 안 지키는 경우가 태반”이라고 꼬집었다.
이는 자산 불평등으로도 이어지고 있다. 노동조합 협상력이 강한 일부 대기업에선 금융위기 이후에도 임금이 올랐지만, 중소기업·비정규직 임금은 정체됐다. 정기예금 금리도 2012년 3%대 초반으로 하락한 이후 1~2%대를 맴돌고 있다. 반면 집값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다. 한국감정원에 따르면, 지역별 아파트 매매가격이 집계된 2012년 1월부터 올해 7월까지 서울의 아파트 평균 매매가격은 63.0% 상승했다. 저축으로 내 집 마련은 옛날 일이 됐다.
이런 상황이 만든 건 ‘노력은 배신한다’는 뿌리 깊은 불신이다. 비정규직·중소기업에 취업하면 평생 비정규직·중소기업에 머물고, 아무리 저축해 봐야 내 집 마련은 불가능하다는 회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