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우리는 과거 어느 때보다 많은 글을 읽고 쓴다. 하루에도 몇 번씩 오고 가는 메일, 각종 SNS 메시지, 넘쳐나는 인터넷 뉴스 등 우리가 생산하고 소비하는 문장은 양적인 면에서 역대 최고일 것이다. 질적인 면에서는 어느 수준일까. 가짜뉴스가 범람하는 시대에 우리는 좋은 문장을 쓰고 있을까?
국내 역사학계에 미시사 연구방법론을 본격 도입한 선구자인 저자는 30여 년간 동서고금의 문장을 두루 탐독해온 경험을 토대로 '문장의 왕국' 조선을 풍미한 명문장에 주목했다. 시대의 조류가 바뀌면 문장에도 파란이 일었고, 때로는 문장이 역사의 흐름을 바꾸기도 했다. 글로 나라를 바로 세우고자 했던 문인부터 새 시대의 문장으로 성리학 바깥세상을 꿈꾼 지식인까지, 역사의 갈림길에서 목숨을 구한 편지 한 장부터 붓을 꺾지 못해 고난을 자초한 절개 높은 상소문까지, 좋은 문장을 음미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조선 사람들은 어떤 문장을 좋아했을까? 조선의 문장가들이 추구한 미학은 무엇이었을까? 1부 '시대의 문장'에서는 여말선초의 전환기에 이색이 무거운 붓을 들어 제자와 정적에게 보낸 편지, 글로 새 나라를 설계한 경세의 문장가 정도전, 문장의 힘으로 국가의 질서를 확립한 세종과 그가 북돋은 실용적 글쓰기의 대가 권채와 박팽년을 통해 시대적 사명이 문장가를 어떻게 움직였는지 살펴본다.
2부 '문장의 시대'에서는 훈구파의 거두이자 문단의 거장 서거정이 아내와 술잔을 기울이며 남긴 소탈한 한시, 옛 문인의 초상화를 벗 삼은 허균의 우정담, 난세를 외면하지 못한 문장가 권필과 백인걸의 피어린 상소문, 티끌세상을 버리고 유불선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든 김시습, 위기에서 나라를 구한 이순신과 유성룡의 절절한 우의, 한중 공동 프로젝트를 기획한 홍대용 등 문장에 실린 세상의 다양한 얼굴을 만난다.
저자는 "우리를 공정하고 평화로운 미래로 안내할 문장의 스승은 어디에나 있다"며 "낡은 시대의 문장이라 해서 모두 낡은 것만도 아니요, 새 시대의 문장이 꼭 좋다고 우길 필요도 없다"고 한다. 그러면서 "문장이 개인의 삶과 나아가 국가의 운명까지 얼마든지 변화시킬 수 있음을 보았다"면서 "그리하여 우리에게도, 문장은 역시 희망"이라고 강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