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부 교열팀장
소설가 정비석(1911~1991)의 수필 ‘들국화’다. 깊고 고요하며 은은한 들국화의 의미를 깨닫게 해주는 글이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들국화가 없다면 가을도 없을 게다. 이맘때 산과 들에 피는 꽃은 거의 국화다. 코스모스도 국화과(菊花科)로, 우리말로는 ‘살사리꽃’이다. 구절초, 쑥부쟁이, 벌개미취, 산국, 감국, 각시취 등 들국화라 불리는 꽃들은 저마다 예쁜 이름을 갖고 있다.
산골 출신인 나는 지천으로 깔린 구절초를 보고 자랐다. 학교를 오고갈 때 무수하게 마주치던 꽃인데 이름을 안 건 불과 몇 해 전이다. 음력 9월 9일에 줄기가 아홉 마디 된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란다. 맑은 흰색 혹은 밝은 보라색 꽃잎이 쑥처럼 갈라져 있다.
특히 올가을엔 구절초의 매력에 푹 빠졌다. 꽃을 모양 그대로 말려 끓인 물을 마시면 머리가 맑아지고 눈이 밝아진다. 꽃잎을 목욕물에 띄우면 들녘의 향기가 퍼져 피로가 스스륵 풀린다. 고운 한지에 싸서 옷장에 넣어두면 보기에 좋고 향기로울 뿐만 아니라 좀이 옷을 쏠지 않아 금상첨화다.
쑥부쟁이 꽃도 연보라색이다. 쑥을 캐러 간 불쟁이(대장장이)의 딸이 죽은 자리에서 돋아났다는 슬픈 전설이 전해진다. ‘그리움·기다림’이라는 꽃말 때문인지 꽃을 가만히 보면 왠지 슬프다.
구절초와 쑥부쟁이는 구분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시인 안도현이 “쑥부쟁이와 구절초를/ 구별하지 못하는 너하고/ 이 들길 여태 걸어왔다니/ 나여, 나는 지금부터 너하고 절교(絶交)다”라고 ‘무식한 놈’이란 시에서 자탄했을 정도다.
이름만 들어도 행복해지는 들국화도 있다. 바로 각시취다. 갓 결혼한 아내, 각시는 얼마나 사랑스러운 존재인가. 또 향기로운 ‘취’는 떡으로도 국으로도 먹을 수 있으니 얼마나 귀한가.
유난히 키가 큰 각시취는 자주색 작은 꽃송이를 꽃다발처럼 피워 올린다. 그래서일까. 강원도 최전방 부대의 군인들은 면회 온 여자친구에게 각시취로 꽃다발을 만들어 주곤 한단다. 가녀린 줄기 끝에 흔들리는 작은 꽃송이가 흡사 목을 길게 빼고 신랑을 기다리는 각시처럼 보인다. 이름과 참 잘 어울리는 꽃이다.
가을, 날이 화창할수록 외롭고 쓸쓸하다는 이들이 많다. 나뭇잎 구르는 소리에도, 푸른 하늘에 흰 구름 흘러가는 모습에도 가슴이 저린다. 가을을 타는 게다. 가을을 앓는 게다. 한 줄기 바람소리에도 마음이 울컥해진다. 이럴 땐 꽃놀이가 제격이다. 꽃바람 꽃향기에 마음까지 꽃물이 들면 웃음이 절로 날 테니. 국화 옆에서 조용히 지난 삶을 돌아보리라. 성질 급한 겨울이 오기 전에. jsjy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