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승길 정치경제부 기자
8개국의 후보자가 경합을 벌인 선거 초기 유 본부장의 당선 가능성은 크지 않았다. 2명이 남는 최종 라운드 진출도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과 함께 유 본부장의 통상 분야 전문성과 정치적 역량, K방역으로 높아진 국가 위상 등이 높은 평가를 받으며 ‘최후의 2인’에 오르는 쾌거를 이뤄냈다. 당시 관가에서는 “최종 라운드까지 간 것만 해도 매우 큰 의미가 있다”며 축하했다.
유 본부장은 지난달 28일 WTO 회원국 선호도 조사에서 경쟁자인 나이지리아 후보에게 예상보다 큰 표차로 뒤졌다. 아쉬운 결과지만 충분히 ‘졌잘싸(졌지만 잘 싸웠다)’로 박수를 받으며 퇴장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판이 꼬인 것은 그 이후다. 미국이 유 후보를 공식 지지하면서 분위기가 바뀌었다. 회원국 중 사실상 유일하게 나이지리아 후보를 거부하고 있다. 이에 외신들은 미국의 일방주의가 다시 발동했다는 해석을 쏟아냈다. 미국의 뒤늦은 이의 제기에 유 본부장을 지지하던 국가들마저 반감을 드러냈다는 보도도 나왔다.
한국의 입장은 애매해졌다. 회원국 다수 의견을 존중해 승복하는 방안이 있지만, 한국이 선거에 남기를 바라는 미국의 의중을 무시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내부적으로도 선호도 조사 결과가 나온 이후 정부는 유 본부장의 ‘아름다운 퇴장’으로 방향을 잡았다. 청와대에서 ‘추이를 좀 더 지켜보자’는 쪽으로 결정을 미룬 것으로 알려졌다.
청와대 입장에선 문재인 대통령까지 나서 유 본부장의 당선을 위해 총력외교를 펼친 만큼 패배를 인정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또 유 본부장의 WTO 사무총장 당선은 코로나19, 백신 사태, 부동산 문제, 검찰 개혁 등 혼란한 정국 속 분위기 반전을 꾀하기 더없이 좋은 사안인 것도 사실이다.
문제는 WTO 회원국의 비난을 견디면서까지 버티는 것이 독이 되진 않을까 우려스럽다는 점이다. 설사 버티기로 컨센서스(의견일치)가 안 돼 투표 진행이 이뤄지더라도 나이지리아 후보가 승리할 가능성이 99%에 달한다는 보도도 나온 상황이다. 독이 든 버티기보다는 한국 정부의 확실한 의사를 표시하는 것이 국제사회의 비난을 피할 방법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