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기계가 아니다”…한국 노동운동사 첫 장 쓴 의로운 죽음
오늘 ‘열사 전태일’ 50주기…정부 국민훈장 무궁화장 추서
당시 참혹한 노동현실 세상에 호소하기 위해 스스로 산화
1970년대 한국 사회·지식인 집단에 경종 울린 일대 사건
반세기 지난 오늘에도 ‘노동존중사회’ 되새기는 이정표로
“나는 만인을 위해 죽습니다.” 1970년 11월 13일 평화시장 노동자 전태일이 어머니 이소선 여사에게 이 같은 말을 남긴 뒤 산화한 지 꼬박 50주년이 됐다. 그는 스스로의 몸에 불을 붙여 참혹한 노동 현실을 호소하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양으로 삼았다. 자신의 죽음으로 내보인 노동 현실의 절박함은 ‘전태일 정신’으로 기억된다. 그는 50년이 흐른 현재까지도 전태일 ‘열사’란 이름으로 노동 존중 사회를 각인하는 이정표로 남았다.
당시 평화시장 재단사였던 스물두 살 전태일은 평화시장 앞길에서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거행하고,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주일에 한 번만이라도 햇빛을 보게 해 달라”, “어린 동심을 보호하라” 등을 외치며 스물두 살의 젊은 나이로 분신 항거했다. 그는 근로기준법이 노동자의 권리를 보호하지 못하는 현실을 고발하기 위해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하기로 결의했다. 그는 서울 청계천 평화시장 앞에서 노동환경 개선을 요구하는 피켓 시위를 벌이며 구호를 외쳤다. 그러나 경찰의 방해는 거셌다. 그 순간 전태일은 몸에 석유를 끼얹고 불을 붙였다. 그는 불타는 몸으로 거리로 뛰쳐나와 마지막까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를 외치다가 쓰러졌다.
전태일을 뒤덮은 불길은 3분가량 타다가 꺼졌다. 당시 그 자리에 서 있던 누군가가 근로기준법 법전을 전태일을 감싼 불길 속에 집어 던졌다. ‘근로기준법 화형식’은 그렇게 이뤄졌다. 이어 전태일의 한 친구가 뛰쳐나와 소리를 지르며 잠바를 벗어서 불길을 덮었다. 전태일은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오후 10시 사망했다.
노동 현장은 ‘분신 투쟁’으로 호소할 정도로 열악했다. 평화시장에서 일하는 10대 여공들은 똑바로 설 수조차 없는 다락방에서 하루 15시간씩 일하며 각종 질환에 시달렸다. ‘하루 8시간 노동’, ‘정기 건강검진’ 등을 규정한 노동법은 현실에서 실효성이 없었다. 노동청 근로감독관도 유명무실했다.
전태일의 분신은 사회적으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서울대 법대생 100여 명은 그의 유해를 인수해 학생장을 거행하겠다고 주장했다. 서울대 상대생 400여 명은 무기한 단식 농성을 벌였다. 11월 20일 서울 시내 학생운동가들이 모여 전태일 추도식을 거행하고 노동자 인권을 보장하라는 공동 시위를 벌였다.
당시 신민당 대통령 후보였던 김대중 전 대통령은 1971년 기자회견에서 ‘전태일 정신의 구현’을 공약으로 발표했다. 이후 신민당은 노동 운동에 호응하는 정책을 전개했다. 신민당 당사는 노동자 시위대가 경찰의 탄압으로부터 몸을 숨기는 피신처로 쓰였다.
전태일 열사의 정신으로 분신 투쟁은 연이어 이어졌다. 1970년 11월 조선호텔 노동자 이상찬의 분신 기도, 1971년 9월 한국회관 노동자 김차호의 분신 기도 등이 일어났다. 노동운동의 기폭제도 됐다. 전태일이 사망한 다음 해인 1971년 노동자 단결투쟁은 1600여 건에 달했다. 이는 1970년 165건에 비해 10배에 가까운 규모였다.
한편 전태일 열사의 50주기를 하루 앞둔 12일 전태일 열사는 노동계 인사로는 최초로 국민훈장 1등급인 무궁화장을 받았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날 전태일 열사의 동생인 전순옥(전 국회의원)·태삼·태리 씨 등을 청와대 본관으로 초청해 국민훈장 무궁화장 추서식을 가졌다. 청와대는 “이번 추서식은 전태일 열사 50주기 추도식을 맞아 노동인권 개선 활동을 통해 국가사회 발전에 이바지한 고인의 공로를 되새기고, 정부의 노동존중사회 실현 의지를 표명하기 위해 마련됐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