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영록의 이슈노트] 재계 어른이 남긴 ‘포스트 코로나’ 먹거리

입력 2020-12-07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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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故) 구본무 LG그룹 회장은 1992년 영국 출장길에서 ‘충전식 배터리(2차 전지)’를 접했다. 한번 쓰고 버리는 건전지가 아니라 충전을 하면 여러 번 반복해서 사용할 수 있는 2차 전지를 접하고 새로운 성장 사업이 될 가능성을 직감했다.

구 회장은 귀국길에 2차 전지 샘플을 가져와 “미래를 걸자”며 당시 럭키금속에 연구·개발(R&D)을 주문했다. LG의 배터리 사업은 배터리 종주국인 일본보다 10년 이상 늦었다. 그러나 2000년대 이후 일본이 주저하는 사이 ‘뚝심 투자’를 이어가면서 일본 업체들을 제치고 세계 1위 자리에 올랐다.

고(故) 이병철, 이건희 회장은 삼성 반도체를 키웠다. 이병철 회장은 “과대 망상증 환자”라고 비꼬는 주변 반응에도 불구하고 1983년 반도체 시장 진출을 선언했다. 아버지의 뒤를 이은 이건희 회장은 파산 직전의 한국반도체를 인수하고, 과감한 투자를 단행했다. 두 회장 통찰력과 돌파력이 아니었다면 현재 ‘반도체왕국’은 꿈꾸기 어려웠다는 게 재계의 평가다.

이건희 회장의 혜안은 1997년 출간한 에세이집 '생각 좀 하며 세상을 보자'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이 회장은 '자동차는 전자제품'이라는 글에서 "오늘날 자동차는 부품 가격 중 전기·전자 제품 비율이 30%를 차지하지만, 누구도 자동차를 전자제품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며 "앞으로는 전자 기술, 반도체 기술이 뒷받침되지 못하면 자동차업을 포기해야 한다는 얘기까지 나올지도 모른다"고 했다. 최근 전기차와 자율주행차 등장을 계기로 자동차가 하나의 전자제품이라는 발상이 보편화한 점을 고려하면 놀라운 선견지명이었던 셈이다.

고(故) 최종현 SK그룹 선대회장은 중동 석유파동의 여파 속에서도 1980년 대한석유공사(현 SK이노베이션)를 인수하면서 ‘석유에서 섬유까지’라는 수직계열화를 완성했다. 특히 1994년에는 한국이동통신(현 SK텔레콤)을 인수해 이동통신사업의 씨앗을 뿌렸다.

최근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통상연구원이 국내 967개 수출기업을 대상으로 벌인 '2021년 1분기 수출산업경기전망조사'에 따르면 내년 1분기 수출산업경기전망지수(EBSI)는 112.1로 집계됐다. 이 지수가 100을 웃돌면 앞으로 수출 여건이 지금보다 개선될 것으로 본다는 뜻으로, 110을 넘은 것은 2017년 2분기 이후 15분기만이다.

석유제품(146.0), 반도체(123.6), 생활용품(122.4), 자동차 및 자동차부품(117.4) 등이 글로벌 수요 회복 전망에 따라 지수가 높게 나왔다. 재계 어른들이 뿌린 씨앗이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맞아 더 빛을 발하고 있다.

특히 반도체와 배터리, 자동차 전장 부품, 5G(5세대 이동 통신) 등은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떠오르는 먹거리다. 새롭게 재편될 코로나 이후 글로벌 시장에서 우리나라가 주도권을 잡을 수 있는 유리한 위치에 서 있는 셈이다.

다만 과거 일본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치열한 글로벌 경쟁에서 자칫 머뭇거리면 한순간에 무너질 수도 있다. 이재용 부회장, 구광모 회장 등 재계 3, 4세 총수들의 역할은 그만큼 중요하다.

'원하든, 원치 않았든' 그 자리에 앉은 이상 그들은 혼자가 아니다. 선대 회장의 '기업가 정신'을 이어받아 대한민국의 미래를 책임져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갖고 있다. 갈수록 관료화돼 가는 기업가의 모습이 아닌, 과감하고 냉철한 통찰력을 통해 또 한 번 도약하는 제대로 된 기업인의 모습을 보여주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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