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주핀란드 대사
2020년은 모두에게 참으로 힘든 해였다. 세계가 이런 환난을 당하면 아무래도 선진국이라는 나라들이 모범을 보일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서방국가들의 팬데믹에 대한 대응은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특히 세계의 주도국임을 자처하던 미국과 영국의 상황은 실망을 넘어 절망감마저 안겨주었다. 작년 말 기준 미국의 코로나19 감염자는 2000만 명에 육박하고 사망자는 33만 명을 넘어섰다. 2차 세계대전에서 희생된 미국 군인들의 숫자를 한참 능가한다.
객관적인 숫자도 그렇지만 우리를 더 실망하게 만든 것은 이러한 재앙에 대한 그들의 대응이었다. 많은 미국 사람들은 입과 코를 가리는 것이 전염병을 막는 데 도움이 된다는 간단한 사실 하나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마스크를 쓸지 말지가 정치적 성향과 지지 정당에 따라 달라졌다. 편 가르기는 엄청난 숫자의 사람들이 죽어나가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다행히 이들 나라의 제약회사들이 개발한 백신이 투여되기 시작하면서 과학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백신이 나오고 나니 백신을 안 맞겠다는 사람들이 적지 않는 모양이다. 한시가 급한 상황인데 미국에서는 합당하지 못한 이유로 백신 투여가 지연되고 있다고 한다. 이성의 회복은 아직 갈 길이 남아 있는 것 같다.
2020년은 매우 이상한 미국 대통령 선거가 치러진 해로도 오래 기억될 것이다. 선거에서 진 후보가 아직도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더 심각한 것은 트럼프 대통령을 지지했던 사람들 가운데 70% 이상이 그가 선거에서 이겼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이런 현상은 허술해 보이기 짝이 없는 투개표 과정에도 책임이 없지 않다. 같은 대통령을 뽑는데도 각 주마다 선거 규정이 다르다. 개표 과정은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느렸다. 언제가 되든지 표를 세면 되지 않겠느냐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선거는 매우 긴장도가 높은 정치과정이다. 빠르게 결론을 내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런데 자고 일어나고 또 자고 일어나도 계속 표를 세고 있다고 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한 우편투표가 많아서 그렇다고 할 수 있지만 대비할 수 있는 시간이 있었다. 미국과 체제 경쟁을 의식하고 있는 중국의 시진핑 주석과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은 당선 확정에 관한 절차가 진행된 뒤에야 당선인에게 축하 메시지를 보냈다. 마치 미국 민주의의에 대한 평결처럼 비쳐지는 순간이었다. 1월 20일 취임식 날 트럼프 대통령이 백악관을 나가지 않으면 강제로 끌어내야 할지도 모른다는 말이 있다. 이런 장면이 세계 사람들의 마음속에 무슨 생각이 들게 할지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이성과 과학의 급격한 추락은 2016년부터 예고되었던 것 같다. 공화당 안에서도 이단아로 취급되던 프럼프 후보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되었고 영국에서는 합리적인 설명이 불가능해 보이는 브렉시트 국민투표가 가결되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빠르게 ‘트럼피즘’에 감염되었다. 갑자기 세상이 거꾸로 뒤집어지는 듯했고 뭐가 잘못되었는지 분간마저 어려운 상황이 벌어졌다. 그러다가 미국에 대통령 선거가 있는 해에 팬데믹이 닥친 것이다. 영국의 BBC방송은 세계의 포퓰리스트 지도자들이 팬데믹 대응에 재앙적으로 실패했다고 평가하면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존슨 영국 총리, 보우소나루 브라질 대통령을 예로 들었다. 과학과 이성은 포퓰리즘을 치료하는 백신이 될 수 있다.
팬데믹이 안개와 같이 아무 흔적을 남기지 않고 사라지기를 바라지만 집을 침수시킨 물처럼 도처에 심각한 후과를 남길 수도 있다. 팬데믹은 이미 미국의 인종, 소득과 같은 사회적 단층선을 더욱 뚜렷하게 만들어 놓았다. 선거는 정책 경쟁이 아니라 ‘우리’와 ‘그들’로 갈라져서 죽기 살기로 싸우는 전쟁이 되었다. 조지 플로이드의 ‘나는 숨을 쉴 수 없다’는 절규는 아직도 귓전에 쟁쟁하다. 이런 순간에 미국, 나아가 세계의 안녕이 고령을 이유로 재선 도전을 포기하겠다고까지 말한 노정객의 어깨 위에 놓여 있다. 부디 그의 취임이 과학과 이성의 회복을 향한 전환점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