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스모크'로 무대에 복귀하는 강은일 배우가 지난달 28일 서울 종로구 대학로의 한 카페에서 이투데이와 인터뷰 하고 있다. 고이란 기자 photoeran@
예전엔 어떻게 하면 성공할 수 있을지, 돈 많이 벌 수 있을지만 생각했어요. 겪지 않았어야 할 일을 겪고 난 후 생각이 많이 바뀌었죠. 사람을 바라보는 시점도 많이 달라졌어요.
배우 강은일은 그 어느 때보다 바쁜 날을 보내고 있다. 뮤지컬 '스모크'의 해 역과 연극 '올모스트메인'의 피트·맨 역을 맡아 모처럼 활발한 활동을 펼치는 중이다. 공연이 없는 월요일이 유일한 휴일이다. 화ㆍ목ㆍ금요일에는 학생을 가르치며 일주일을 꼬박 채운다.
최근 서울 종로구 혜화역 인근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강은일은 "(연기를) 하고 싶은 마음이 제 안에 남아있었고, 그만큼 간절했다"고 말문을 열었다.
지난해 4월 대법원에서 최종 무죄를 확정받기까지 강은일은 힘든 나날을 보냈다.
사건은 2018년 3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서울의 한 식당에서 술자리를 갖던 중 동석한 여성 A 씨를 강제로 추행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1심에서 징역 6개월이 선고돼 법정 구속이 됐다. 보석으로 풀려나기 전까지 4개월 넘게 구치소 생활을 견뎌야 했다.
처음엔 가족에게 말하지도 않았어요. 정말 떳떳했고, 무죄를 입증할 증거가 많았기 때문에 무혐의 처분을 받아서 해프닝으로 끝날 줄 알았거든요. 뒤늦게 변호사를 선임하고 재판 준비를 했지만, 1심 재판 당시 16개의 증거를 제출했는데 10개가 빠진 거예요. (누락된 목록에) CCTV 영상이 있었어요. 바로 법정 구속이 돼버렸죠. 2심 때 변호사를 바꾼 후 다시 CCTV 영상을 증거로 제출했어요. 과학수사대 영상분석가한테 의뢰한 후 다른 시각으로 봐야 보이는 CCTV라는 것을 입증하게 됐고, 2심과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그 무렵은 인기 드라마 '이태원 클라스' 캐스팅이 점쳐질 만큼, 이른바 '잘 나가던' 때였다. 당시 강은일은 출연이 예정된 뮤지컬에서도 하차해야 했다. 소속사와 전속계약도 해지됐다.
제가 고의로 만든 일은 아니었지만, 그걸 회사에 떠넘길 수 없었어요. 계약이 해지됐다고 원망하는 것 자체가 구차한 거죠. 매니저도 면회를 와주었고, 엄마가 직접 계약해지 서류를 받으셨어요. 저는 연기를 안 하면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생각했어요. 무엇보다 가족들이 너무 많이 좋아해 줬고 지지했기 때문에 다른 일을 할 거라 생각도 안 했었죠. 그런데 그런 일이 생기고 나니 살아갈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다 끝내려고 했습니다.
▲배우 강은일. 고이란 기자 photoeran@
강은일은 삶에 대한 희망까지 잃어버렸던 사실을 담담한 표정으로 털어놨다.
1995년생인 그에게 생긴 3년간의 공백은 적잖은 부담이었다. 소송으로 생긴 억대의 빚도 해결해야 했다. 그는 복귀 전까지 래퍼 '자이언트 핑크'가 운영하는 가게에서 아르바이트하며 지냈다.
그러던 중 뮤지컬 '스모크'에 출연이 확정됐다는 전화를 받았다. 본인의 소속사였던 '더블케이필름앤씨어터'가 제작한 작품이었다.
그 자리에서 엉엉 울었어요. 김수로 대표님한테 연락을 받기 전에 소속사 안에서 제 사건을 하나하나 봐주던 누나가 있는데, 그 누나가 '스모크' 회의 때 제 이름이 나왔다고 귀띔을 해주더라고요. 그때까지 나는 "못해"라고 말해왔어요. 연기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며 항상 회피해왔죠. 그런데 누나의 말 한마디에 정말 하고 싶다고 말해버렸어요. 그때 알았어요. 그동안 스스로 방어하려고 하기 싫다고 말하고 있었던 거였죠.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오디션을 보는 것 자체가 제작사에 부담일 것으로 생각했다.
'올모스트메인'도 마찬가지예요. 한림예고 선배들이 오디션 보라고 할 때 '못한다'라고 했었어요. 형들이 피해 볼 거라고요. 그런데 어느 날 제가 술김에 용기 내서 형들에게 너무 하고 싶다고 말해버린 거죠. 형들이 "다 짊어지겠다"고 했었습니다. 그래서 오디션 이틀 전에 도전하게 됐어요. 제게 같이 하자고 연락해주신 분들은 오직 저라는 사람만 봐주신 거잖아요. 정말 감사한 마음뿐입니다.
요즘 강은일은 무덤덤해지려 노력하는 중이다. 하지만 자신에게 남아있는 아픔을 억지로 털어낼 생각은 없다.
그는 현재 출연하고 있는 뮤지컬 '스모크'에 자신을 투영시키는 중이다. 작품은 이상의 '오감도 제15호'를 모티프로 만들어졌다.
이상의 시와 삶을 소재로 시대를 앞서가는 천재성, 그리고 암울한 시대에서 살아야만 했던 예술가의 불안, 고독, 절망, 이를 이겨내고 싶었던 열망 등이 미스터리한 분위기 속에서 전개된다. 강은일은 바다를 꿈꾸며 그림을 그리는 순수한 소년 해(海) 역의 해 역을 맡았다.
2018년 4월 첫 공연 때는 마냥 어려웠어요. 이해하기 어려워 선배들과 논쟁을 하면서 진행했죠. 하지만 이제 알 거 같아요. 이상은 자신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과 세상의 발걸음이 맞지 않아 절망하고 고통스러워했어요. 그런데도 글을 써내려가겠단 그의 마음이 지금의 제 마음과 너무 잘 맞아떨어지는 거죠.
강은일은 대사 하나하나를 새기면서 참여하고 있다. 최근 공연에선 배우 김재범의 눈빛에 울컥한 순간도 있었다.
그날 재범이형이 제 눈을 지그시 바라보는 거예요. 항상 기운 없던 형이 '날개'를 부르면서 웃는 거예요. 그 모습을 보니 저도 모르게 기운이 났어요. '눈동자'란 넘버도 이젠 다르게 받아들이면서 하고 있어요. 예전엔 저를 비난하는 눈동자로 이해됐고, 그런데도 저는 당당하게 나아갈 거라고 말하려 애썼어요. 하지만 이젠 저 자신을 보는 눈동자로 해석돼요. 세상이 '트루먼 쇼'처럼 몰래카메라 같았고, 저조차도 가짜 같았던 순간이 있었거든요. 매일 다르게 받아들이고 있지만, 정말 많이 와 닿는 부분들이죠.
▲배우 강은일. 고이란 기자 photoeran@
강은일은 무대 복귀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 배우 최재림에게 연락해 노래도 배웠다.
반면 그의 삶은 소박해졌다. 빚을 갚기 위해 차도 팔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중이다. 커피값마저도 아끼고 있다. 그는 이르면 올 연말, 늦으면 내년 초 입대를 계획 중이다.
상처받을까 봐 온라인 커뮤니티도 안 보고 있었는데, 주변에서 보라고 하셔서 봤어요. 많은 분이 절 응원해주고 계시더라고요. 잘하고 싶어졌어요. 공연 커튼콜 때 한 분 한 분 눈을 마주하면 눈물이 나요. 어떻게 갚아야 할까요? 실력으로 보답하고 싶어요. 그 자리에 계셔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