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필
일본은 고도성장기인 1970년대 복지 확대로 재정지출이 늘기 시작했다. 90년대 경제거품이 꺼지자 문제가 나타났다. 재정은 한 방향으로 커지기만 하는 불가역성(不可逆性)을 갖는다. 일본 정부는 빚을 내 복지지출 적자를 메웠고, 경기부양을 위한 대규모 사회간접자본(SOC) 사업에 재정을 쏟아부었다. 땅도 좁은 나라에 90여 곳의 지방공항과 수많은 고속도로를 건설했다. 선거에서 표 얻는 데 급급한 정치인들의 작품이다. 비행기 없는 공항, 자동차는 별로 다니지 않는 ‘다람쥐 도로’가 양산됐다.
1980년대 말까지 균형을 이뤘던 일본 정부 세입·세출에 틈새가 벌어졌다. 인구 고령화까지 겹쳐 세출은 급증하고 세입이 쪼그라들어 쩍 벌린 악어 입 그래프가 그려졌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채무비율이 1990년 64%에서 96년 100%를 넘었고, 2002년 150%, 2009년 200%대로 치솟았다. 작년에는 240%를 웃돈 것으로 보인다.
그래도 일본은 괜찮다. 해외의 금융순자산이 3조 달러(340조 엔) 이상으로 세계 1위다. 기업이 외국 사업체를 많이 사들였고, ‘와타나베 부인’들이 해외 주식·채권에 대규모로 투자한 돈이 방어벽이다. 정부 국채의 90% 이상을 중앙은행과 국민이 보유한다. 이 채권이 매도될 염려없이 금융시장을 지탱한다.
일본은 사실상 기축통화국이다. 엔화는 국제결제 통화로 대표적 안전자산이다. 글로벌 금융시장이 불안하면 돈이 일본으로 몰리고, 중앙은행이 돈 찍어 풀어도 문제가 안 된다. 아베 신조 정권이 2012년 출범 후 엔화를 마구 발행해 경기 추락을 막는 방법을 썼다.
한국 재정이 악어 입에 들어가고 있다. 정부의 돈 씀씀이만 커지고, 경기 후퇴와 기업실적 부진으로 세금이 덜 걷히면서 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난 탓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근거가 뭐냐?”는 한마디에 재정건전성의 마지노선이었던 국가채무비율 40%가 간단히 무너진 것이 방아쇠였다.
작년 국세 수입이 285조5000억 원으로 2019년보다 2.7% 줄었다. 외환위기 때인 1998년(-3.0%) 이후 최대 감소다. 반면 코로나19 충격으로 정부는 4차례나 추가경정예산을 편성하면서 지출이 급증했다. 앞뒤 안 가린 팽창재정에 돈이 모자라 적자국채 발행으로 메웠다. 나라살림 지표인 관리재정수지 적자가 작년 110조 원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국가채무는 2019년 723조2000억 원(채무비율 37.7%)에서 지난해 846조9000억 원(44.2%)으로 급격히 늘었다. 올해는 본예산만으로도 빚이 956조 원, 채무비율 47.8%를 넘는다.
IMF는 최근 세계경제전망에서 한국의 GDP대비 채무비율이 2025년 64.96%로 급등할 것이라며 재정건전성 문제를 환기했다. 중앙·지방정부 채무(D1)에 비영리공공기관 빚을 더한 일반정부 부채(D2) 기준이다. 올해 52.24%, 내년 55.80%, 2023년 59.25%, 2024년 62.27%로 상승속도가 매우 빠르다. 그러나 이것도 부채규모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 우리는 많은 정부사업을 공기업이 떠맡는다. 이를 포함한 나랏빚인 공공부문부채(D3)가 이미 2019년 1132조6000억 원, 채무비율 59%에 달했다.
우리는 빚을 끌어올 기초여건부터 일본과 다른 악성(惡性) 부채다. 중앙은행이 돈을 마음대로 찍어낼 수 있는 나라도 아니다. 빚을 더 내 이자를 갚아야 하는 지경이 되면, 국가신용과 원화값 추락으로 자본이 탈출한다. 그런데도 정권은 코로나19를 빌미로 4차 재난지원금 추경과 한국은행 발권력을 동원한 자영업 손실보상에, 기본소득제 주장까지 돈 퍼붓기로 일관하고 야당까지 거든다. 4월 서울·부산 시장 보궐선거, 내년 3월 대통령선거를 앞둔 포퓰리즘으로만 치닫고 있다.
불과 20여 년 전 우리는 빚으로 만들어진 경제 거품이 꺼지고 해외자본이 썰물처럼 빠져나가 국가부도 위기를 맞으면서 IMF 구제금융을 받았다.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고 지금도 심각한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모든 경제위기는 정부·기업·가계의 과도한 빚에서 비롯된 것이 역사의 증거다. 정치꾼들은 우리 재정건전성이 선진국보다 양호해 빚을 더 늘려도 되고, 한은이 무제한 돈을 찍어내야 한다며 무식한 목소리를 높인다. 빚 갚아야 할 국민을 속이고 나라를 망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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