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름 끊긴 10대와 모텔…대법 "동의라 볼 수 없어, 성범죄 맞다"

입력 2021-02-22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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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에 만취한 10대 모텔에 데려간 20대 남성
대법원 "피해자 '블랙아웃' 동의라 볼 수 없어"
2심 무죄 판결 뒤집고 유죄 취지 파기 환송

(게티이미지뱅크)

피해자가 술에 만취해 블랙아웃 상태이면 준강제추행죄가 성립할 수 있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가해자가 동의했다고 주장하더라도, 술에 만취한 성범죄 피해자가 당시 상황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전후 사정을 따져 동의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법원은 형사정책연구원에 연구용역을 의뢰하는 등 3년에 걸친 심리 끝에 이른바 술에 취해 의식이 없는 ‘알코올 블랙아웃’도 상황에 따라 심신상실 상태로 인정할 수 있다고 봤다.

대법원 3부(주심 민유숙 대법관)는 준강제추행 혐의로 기소된 공무원 A 씨 상고심에서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유죄 취지로 파기하고 사건을 수원지법으로 돌려보냈다고 21일 밝혔다.

A 씨는 2017년 2월 새벽 술에 만취한 10대 B 양을 우연히 마주친 뒤 숙박업소로 데려가 강제 추행을 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당시 A 씨는 B 양 친구의 실종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에 의해 현장에서 검거됐는데, A 씨는 "B 양이 좀 자고 싶다고 말했다"며 피해자 동의를 얻었다는 취지로 진술했다.

다만 B양은 조사 과정에서 “화장실에서 구토한 뒤 술기운이 급격히 올라왔고 그 이후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고 증언했다. 술에 취해 자신이 한 행동들을 기억하지 못하는 ‘알코올 블랙아웃’ 상태였다.

이에 관해 1심과 2심 재판부는 다르게 판단했다. 1심 법원은 A 씨 혐의를 인정하고 징역 10개월을 선고했으나 2심은 A 씨 측 주장을 받아들여 무죄를 선고했다. 당시 숙박업소 폐쇄회로(CCTV)상 B양이 비틀대거나 부축을 받는 모습 없이 자발적으로 이동한 점, “술에 취한 줄 몰랐다”는 숙박업소 종업원 진술 등을 들어 “심신상실 상태가 충분히 증명되지 않았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대법원은 이를 다시 뒤집고 A 씨를 유죄라고 판단했다. 쟁점은 준강제추행의 성립 요건인 ‘심신상실’ 여부였다.

재판부는 당시 B 양이 노래방에 함께 간 친구의 신발을 신고 외투와 휴대전화를 둔 채로 이동했던 점, 경찰이 숙박업소로 찾아온 것을 알면서도 옷을 입으려 하지 않고 그대로 쓰러져 있던 점 등을 들어 “판단 능력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 상태”로 보았다.

아울러 두 사람이 일면식이 없었고 당시 28세, 18세로 나이 차이가 컸던 점, A 씨를 만나기 전 B 양이 1시간 동안 소주 2병을 빠르게 마신 점 등도 고려됐다.

재판부는 “피해자가 의식상실 상태는 아니지만, 알코올의 영향으로 추행에 저항할 수 있는 능력이 떨어진 상태였다면 준강간죄나 준강제추행죄를 적용할 수 있다”며 “여러 정황에 비춰볼 때 피해자가 A 씨와 성적 관계를 맺는 것에 동의했다고 볼 정황을 확인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이어 “제반 사정에 대한 고려 없이 블랙아웃이 발생해 피해자가 기억을 못 한다는 이유만으로 동의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판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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