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전기차 등 미래 산업에 사활
삼성 등 한국 기업, 미국 내 생산 확대 압박 거세질 듯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글로벌 공급망을 자국 중심으로 구축하겠다고 만천하에 선포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달 31일(현지시간) 약 2조3000억 달러(약 2500조 원)에 달하는 대규모 인프라 계획을 발표하면서 ‘세계 최대 소비시장’인 미국을 ‘세계의 공장’으로 변모시키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보인 것이다.
미국 CNBC방송에 따르면 바이든이 이날 내놓은 부양책은 8년간 2조 달러가 웃도는 대규모 자금을 투입해 도로와 교량, 공항 시설을 개선하고 반도체와 전기차 등 첨단 제조업체에 투자하는 것이 골자다.
구체적으로는 △교량, 도로 건설 등 인프라 투자에 6210억 달러 △노인, 장애인 등 지원에 4000억 달러 △식수 공급 관련 상수도 인프라와 광대역 인터넷망 및 전력망 개선 등에 3000억 달러 △학교 건설과 개선, 신규주택 건설과 개조 등에 3000억 달러 △미국 제조 및 연구·개발(R&D), 직업훈련 지원 등에 5800억 달러를 각각 투입한다.
제조업 부흥을 표명한 바이든의 새 구상에 삼성전자와 현대차 등 한국 기업은 미국 내 생산을 확대하라는 압박이 더 거세질 것으로 보인다. 바이든 대통령은 이날 연설에서 “미국 근로자와 미국산 제품을 우선하지 않는 기업과는 절대 계약을 맺지 않을 것”이라며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제품을 미국에서 얻을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현재 국내총생산(GDP)의 1% 미만인 R&D 지출도 2%로 높일 것이라고 공언했다. 또 새 인프라 계획은 반도체와 전기차 등 향후 미래 산업 핵심이 될 분야에서 공격적으로 투자해 중국의 추격을 따돌리겠다는 의도를 분명하게 나타냈다. 인프라 계획에는 미국 반도체 산업을 위한 500억 달러의 이니셔티브가 포함됐다. 국가반도체기술센터(NSTC)를 설립하고 미국 내 반도체 생산에 인센티브를 제공하며 R&D와 칩 설계를 지원한다.
전 세계적인 공급망 혼란과 반도체 품귀 현상 속에 바이든 대통령은 미국 내 첨단제품 생산을 위한 광범위한 공급망 검토를 정부에 지시한 상태다. 여기에 ‘반도체 굴기’를 추구하는 중국이 첨단 칩 기술 분야에서 미국의 선두자리를 위협하고 있다. 이에 전폭적인 반도체 산업 지원 방안은 초당파적인 지지를 얻고 있다.
한때 미국은 세계 최대 반도체 생산국이었다. 반도체산업협회(SIA)에 따르면 전 세계 반도체 제조에서 미국의 점유율은 1990년의 37%에 달했다. 그러나 현재는 12%로 명성이 퇴색한 지 오래다. 반도체 강국 지위는 한국, 대만 등 아시아 국가들이 누리고 있다. 이에 인텔 등 미국 업체는 반도체 왕관을 탈환하겠다는 바이든의 이니셔티브에 일제히 환영 성명을 냈다.
자동차 업계의 화두가 된 전기차 부문에서도 바이든은 공급망 구축에 사활을 걸었다. 1740억 달러 예산을 책정, 부품 조달부터 생산까지 가능하게 한다는 계획이다. 미국에서 전기차는 여전히 틈새시장 제품에 그치고 있다. 신차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 도로상의 모든 자동차에서는 1%에 불과하다.
그러나 전기차는 피할 수 없는 시대의 조류다. 기후변화 대응 움직임 속에 폭스바겐과 제너럴모터스(GM) 등 전 세계 유수의 자동차 업체들이 늦어도 2030년대 중반까지는 내연기관 차량 생산을 중단할 방침이다. 이런 흐름을 놓치면 미국 자동차 산업은 몰락할 수밖에 없다. 뉴욕타임스(NYT)는 “바이든이 2030년까지 충전소 50만 개를 설치하는 등 인프라를 구축해 자동차 제조업체들이 미국에서 전기차와 배터리를 생산하도록 도움을 주려는 것”이라고 풀이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이와 함께 부양책 재원 마련을 위한 증세안도 공개했다. 현행 21%인 법인세율을 28%로 올리기로 한 게 대표적이다. 다만 새 인프라 계획은 의회 문턱을 넘어야 하는데 증세를 통한 재원 마련은 야당인 공화당과 기업의 거센 반발에 부딪힐 것이 확실시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