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정 동아대학교 국제전문대학원 교수
이와 같이 프랑스 사회가 극소수의 엘리트 중심으로 조직될 수 있었던 배경을 쫓아 보면, 프랑스 대혁명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혁명 이전 시기 대학은 가톨릭교회 중심으로 운영되어 왔으나, 왕권과 귀족 나아가 교회까지 혁명의 대상이 되는 상황에서 대학교육은 마비되었다. 이에 혁명정부는 대변혁을 딛고 나라를 이끌 전문적 능력을 갖춘 재원을 양성하고자 그랑제콜 체계를 조직한 것이다. 혁명정부는 가문과 배경을 배제하고 능력만을 기준으로 삼아 엄격한 선발과정을 통해 우수한 엘리트 집단을 선택하고자 하였다. 18세기 유럽대륙의 정치철학 또한 절대주의 및 중상주의를 배격하고 계몽주의 나아가 기능주의 사조로 흐르고 있었다. 당시 프랑스의 기능주의는 테크노크라트(technocrat:기술관료) 집단에 의한 합리적이고 전문적인 정치와 경영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사상적 배경 아래에서 프랑스에서는 세분화·전문화된 분야의 소수 그랑제콜 출신 엘리트 집단의 활약이 요구되었다. 프랑스의 독자적 기능주의는 과학, 기술, 전문성에 대한 사회의 강한 신뢰감이 반영된 특징을 가진다. 68혁명 이후 프랑스 내 일반 대학 전체가 평준화되어 위계서열은 사라졌으나, 그랑제콜 진학을 위한 소수 상위권 그룹의 극심한 경쟁은 지속되어 왔다.
프랑스 마크롱 대통령이 모교인 ENA의 폐교를 단행한 배경에는 2018년 10월 이후 확산된 ‘노란조끼’ 시위대의 불평등 해소 촉구가 있다. 당시 경유세 23%, 휘발유 15%의 유류세 인상이 발표되자 불황에 고통을 겪던 서민들은 불만을 집단화하였다. 프랑스에서는 교통사고 시 긴급상황임을 알리는 용도로 노란조끼의 휴대를 의무화하고 있다. 즉 노란조끼 시위는 운전자들의 대(對)정부 항의인 것이다. 도심에서 다소 먼 거리에 거주하며 출퇴근할 수밖에 없는 서민에게 유류세 인상은 고통이었다. 유류세 인상이라는 단일한 이슈만으로도 장기불황과 양극화에 켜켜이 쌓였던 국민들의 불만이 터져나온 것이다. 정부는 곧바로 인상 계획을 철회하였으나, 유류세 이외의 사회문제에 관한 시위의 요구는 2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어져왔다. 사회문제에 대해 소극적으로 반대해 온 민중은 이른바 ‘노란조끼형’ 저항을 통해 적극적 변화를 요구했다. 전세계적 현상이 된 불평등과 양극화 문제는 시위를 일상으로 만들었다. 게다가 코로나19 장기 지속 상황에서 프랑스 정부는 보건방역 및 집중치료 등의 의료서비스에 취약하다는 지적을 받아 왔다.
대선을 1년 앞둔 마크롱 대통령은 공공서비스를 위한 개혁의 일환으로 ENA의 폐교를 공식화하였다. 즉 시위대가 요구한 사회구조적 문제에 대한 응답으로 사회의 건강한 가치인 다양성을 확보하기 위해 엘리트주의 산실인 ENA부터 개혁하겠다는 것이다. ENA는 그동안 철저히 실력 중심으로 입학생을 확보해 왔다고 주장해 왔으나, 학생들의 부모가 대부분 고위공직자이거나 기업 최고경영자(CEO) 등 특권층에 속하며 노동계층 배경의 출신자가 1%에도 미치지 못함을 지적받아 왔다. 마크롱 대통령은 사회계층 간 이동성이 필요하며, 미래의 지도자 집단은 주요 직책에 오르기 전에 현장과 지역 기관에서 경험을 쌓을 필요가 있음을 역설하였다.
경제학자 스콧 페이지는 “다양성이 능력보다 중요하다(Diversity trumps ability)”고 하였다. 현재 각국 사회는 계층, 지역, 인종, 이문화(異文化), 연령 등 집단 간 반목과 차별, 배제를 경험하고 있다. 다양성 가치의 추구를 위한 프랑스의 선택은 시작되었다. 이를 통해 사회계층 간 이동성이라는 목표와 더불어 격차 해소 및 사회가치와 정의의 복원이라는 개혁에 가 닿을 수 있을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