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블러'가 골목 생태계도 바꿨다…빵 파는 '스타벅스'에 동네 베이커리 근심 깊어
"편의점이 빵 파는 거요? 글쎄요. 영향이 있긴 하겠지만…(건너편 스타벅스를 가리키며) 저기가 더 문제죠."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서현동의 한 베이커리 점주 김형원 씨(이하 가명)는 편의점의 자체 브랜드 빵 출시로 매출에 영향이 있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14일 만난 김 씨는 경기도 대표 오피스 상권인 이 곳에서 2년 반 전 아들과 함께 50평 규모로 베이커리 프랜차이즈 사업을 시작했다.
사업을 해오면서 이런저런 사정으로 언제나 부침은 있었지만 몇달 전 인근에 스타벅스가 문을 연 후 김 씨가 느끼는 위기감은 예전과 또 다르다. 그는 "주변에 경쟁업체가 생겨도 한 두 달 손님이 빠졌다가 회복되곤 했다"며 "젊은 사람들이 아무래도 '폼 나는' 스타벅스를 찾으니 앞으로는 상황을 장담하기 어렵지 않겠냐"고 되물었다.
그의 말처럼 요새 골목 빵집이 가장 두려워하는 상대는 옆에 새로 생긴 빵집이 아닌 스타벅스다. 지난해 기준 전국에 1508개 매장을 보유한 스타벅스는 전 매장에서 빵을 판다.
일주일에 3번 이상 스타벅스를 찾는다는 30대 직장인 허종호 씨는 "코로나19로 재택근무가 늘며 와이파이 등이 갖춰져 있는 커피 전문점을 찾게 된다"며 "커피와 함께 빵 등으로 간단한 식사를 할 수 있는 것도 장점이라 하루 1만 원정도의 돈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진 않는다"고 했다.
최근 유통업계에 부는 '빅 블러(Big Blur)' 바람은 시장에서 경쟁 관계를 새롭게 정립하고 있다.
기존의 고유 영역과 법칙이 무너지고 경계가 모호해지는 현상을 뜻하는 '빅블러'는 커피 전문점에서 '빵'을 팔고, 편의점에서 '치킨'을 파는 등 시장 곳곳에서 대세로 자리잡고 있다.
갈수록 경쟁이 치열해지고 코로나19 사태 이후 소비가 위축되면서 각 업종들로서는 생존을 위한 수익 다변화 차원의 움직임이다. 이 과정에서 대형 유통업체의 사업 확장은 골목상권에서 버텨온 영세 자영업자의 설 자리를 좁힌다는 점에서 "빅 블러가 골목을 을(乙)의 전쟁터로 만든다"는 지적이 나온다.
학원 밀집 상권인 서울 강남구 대치동에서 수년째 카페를 운영 중인 이정숙 씨는 최근 우후죽순처럼 생기는 저가형 프랜차이즈 카페에다 꾸준히 늘어나는 주변 편의점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이들이 맛과 가격 경쟁력으로 무장한 컵커피 상품을 꾸준히 내놓고 있어서다. 실제 편의점 CU에서 판매하는 즉석 원두커피인 '겟커피'는 한해 누적 판매량이 약 1억4000만 잔으로 3연 연속 전체 상품 중 판매 2위에 오를 만큼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
시중 편의점에서 내놓은 원두커피 가격은 '1000원대'로 이 씨가 판매하는 커피값(4000원)의 절반 수준이다. 이 씨는 "학원가에 자리한 만큼 등교, 등원하는 학생들이 주고객"이라며 "아무래도 싸고 양이 많은 커피를 선호하는 특징이 있다"고 설명했다.
그렇다고 골목 상권에서 취급 품목을 늘리는 편의점도 상황이 녹록지만은 않다. 이들 역시 자영업자로 편의점 본사와의 관계를 따지면 갑을 관계 중 '을'에 가깝다. 김명희 씨는 지난해 12월 대치동 학원가 편의점을 인수해 올해 1월부터 본격적으로 영업을 시작했다. 코로나19에도 자본을 '영끌'해 공격적으로 사업에 나선만큼 안착이 절실하다.
초보 점주 김 씨가 가장 신경 쓰는 부분은 '상품 발주'다. 그는 "학생들 수업이 재개되면서 학생들이 냉장식품, 치킨, 김밥 등을 많이 찾는다"며 "요즘엔 학생들도 맛있는 제품을 찾는 것 같아 어떤 상품을 발주해야 할지 고민"이라고 말했다.
이날 저녁 약속이 있어 강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약속 장소인 을지로로 가면서 명동 거리를 지났다. 저녁 시간인데도 예전처럼 사람이 많지 않아 걷기엔 쾌적한 기분이 들었다. 길거리 화장품 로드샵 입구엔 '임시휴점' 팸플릿이 봄바람에 속절없이 나부낀다. 어디도 만만한 곳은 없어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