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천대 교수, 전 경기과학기술진흥원장
문 대통령이 반도체 현장을 방문한 것은 취임 후 다섯 번째다. 문 대통령은 지난 2018년 10월 SK하이닉스 청주공장 준공식을 필두로 2019년 4월 삼성전자 화성사업장의 시스템 반도체 비전·전략 선포식, 2019년 11월 충남 천안의 MEMC 코리아 실리콘 웨이퍼 2공장 준공식, 2020년 7월 SK하이닉스 이천공장에서 열린 ‘소재·부품·장비(소부장) 2.0 전략 보고 대회’에 참석했다. 문 대통령의 산업현장 나들이는 4년 동안 대기업을 중심으로 30차례가 넘는다.
이렇게 잦은 현장 방문에도 불구하고 국민과 기업인들에게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한 이유는 문재인 정부가 대기업과 중소·벤처기업의 조화로운 생태계를 키우는 것보다는 상호 대립각을 세우는 분리정책을 추진했기 때문이다. 그 상징적인 사례가 재계의 총본산인 전경련(전국경제인연합회)을 무기력하게 만들고, 그 대신에 중견·중소기업 모임인 상의(대한상공회의소)를 한국경제의 대표격으로 내세운 것이다. 정부 내에서는 새로 출범한 중소벤처기업부가 득세를 하고, 산업통상자원부가 뒤로 밀리는 일도 벌어졌다. 이에 따라 국가 경쟁력과 미래를 담보할 굵직한 산업정책보다는 생계형 중소기업에 스프링클러로 물을 주듯이 재원을 무차별 살포하는 지원대책이 중시되는 양상이 뚜렷이 드러났다.
과거 김대중 정부에서는 대기업의 안티테제(반정립)로서 중소기업 정책을 강화했다. 당시 세계적으로 IT(정보통신기술)를 중심으로 한 ‘뉴 이코노미’(신경제학) 바람이 불어 우리 정부도 IT 벤처정책을 정면에 내세웠다. 이것이 DJ노믹스의 핵심이었다. 그러나 대기업이 뒤로 빠진 채 추진된 IT 벤처정책은 정책자금이 대거 투입되면서 벤처 버블을 일으켜 절반의 성공으로 막을 내렸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지금까지 IT강국 코리아를 내걸 수 있는 기반이 그때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이를 이끈 주인공은 삼성SDS 대표 출신의 남궁석 정보통신부 장관이었다.
노무현 정부는 DJ노믹스의 많은 부분을 승계했다. 대기업은 역시 경제정책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IT 839 정책’을 내놓은 것은 큰 성과로 꼽힌다. 정보통신 관련 신규 서비스, 인프라, 첨단기술들을 망라한 종합 정책이었다. 진대제 전 삼성전자 대표가 정보통신부 장관으로 이 정책을 추진했다. 노무현 정부는 정권 말기에 경제활성화를 위해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상생을 들고 나왔지만 너무 늦었다.
문재인 정부는 김대중·노무현 정권의 ‘데자뷔’(기시감)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앞선 두 대통령이 재임했던 1998~2008년 당시와 지금은 사정이 사뭇 다르다. 지금은 제4차 산업혁명의 가속화, 코로나19 팬데믹의 만연, 미·중 기술패권 경쟁 등 글로벌 격변기의 한복판에 놓여있다. 경제와 국가안보 위기가 맞물려 국가기반을 흔들 수 있는 경제안보 위기의 시대다. 일본이 촉발한 소부장 위기, 미·중 마찰과 글로벌 공급망(서플라이체인) 각축전에서 돌출된 반도체 위기는 그 파장이 확산되고 있는 현재진행형이다.
문 대통령이 K반도체 전략을 현장에서 보고 받으면서 작금의 ‘기술-기업-산업-국가’로 이어지는 위기의 사슬을 통찰하는 기회를 가진 것은 너무 늦었지만 다행일 수 있다. 한국의 10대 품목별 수출을 보면 반도체, 자동차, 석유제품이 압도적인 상위를 차지하고 있고, 그 뒤를 선박해양, 합성수지, 자동차 부품 등이 잇고 있다. 어떤 품목이, 어떤 기업이 한국경제를 이끌고 있는지는 명료하다.
대기업은 정부와 너무 밀착해서도 안되지만 정치적으로 ‘왕따’ 대상이 되어서도 안 된다. ‘GM에 좋은 것은 미국에도 좋다’, ‘도요타는 일본이다’라는 인식을 가진 미국과 일본처럼 대기업과 국가의 혼연일체는 어렵다고 하더라도 정부가 대기업과 함께 나라를 걱정하는 파트너십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21일 문재인 대통령의 방미 길에 경제계 대표들이 동반한다고 한다. 나라 밖에서 함께 한국을 바라보면 안에서 볼 때와는 전혀 다른 풍경이 보일 것이다. 정부와 경제계가 함께 새로운 시각에서 경제안보 위기를 파악하고 공감하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