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팡 덕평물류센터에 불이 난 17일 오전 11시께 쿠팡은 김범석 창업자의 이사회 의장과 등기 이사 사임에 관한 보도자료를 배포했다. 김 창업자의 사임 일자는 17일 전인 5월 31일이었는데 말이다. 이어 12시께는 쿠팡이 부산에 추가 물류센터를 건립해 물류센터에만 올해 1조 원을 투자한다는 보도자료를 내놨다.
쿠팡 측은 다소 ‘생뚱’맞지만 한 언론이 쓴 김 창업자의 사임 '단독' 기사에 문의가 이어져 설명이 필요했고, 부산시와 물류센터 건립 MOU를 체결하는 날이라 미리 준비한 자료였다고 해명한다.
만약 주식 시장을 염두에 둔 준비였다면 결과는 성공적이다. 쿠팡의 물류센터 추가와 김 창업자의 사임 소식이 화재 5시간 후가 아닌, 미국 증시 개장 12시간 전이라고 관점을 바꾸면 더욱 그렇다.
17일 미국 증시에서 쿠팡의 종가는 39.73달러로 전일보다 2.74% 올랐다. 18일에도 불과 0.81% 떨어진 후 21일 0.08% 반등해 화재 발생 전(16일) 대비 상승폭은 1.99%다.
쿠팡의 언론 대응으로 화마를 입은 덕평 센터는 앞으로 추가되는 많은 센터 중 하나로 의미가 축소됐고, 의결권 76%를 보유한 창업자의 위험부담이 줄었다는 점이 반영됐을 터다. 쿠팡은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에 제출한 증권신고서에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경영의 주요 리스크로 지목한 바 있다. 여기에 국내 사업이 대부분인 김 창업자가 ‘글로벌 경영’에 전념한다니 투자자들에게는 해외 진출 공식화로 해석될만한 굿뉴스다.
하지만 한국 고객의 입장에서는 화가 나는 대목이다. 김 창업자의 등기 이사 사임 소식은 화재 진압 중 실종된 김동식 119구조대장이 19일 숨진 채 발견되자 쿠팡 불매 운동으로 번졌다. '쿠팡 탈퇴'라는 해시태그를 단 관련 트윗이 10만 건을 넘을 만큼 국민적 공분이 커지고 있다.
부랴부랴 쿠팡은 “故(고) 김동식 구조대장의 유가족과 덕평물류센터 직원들에 대해 최대한 지원하겠다”며 수습에 나섰지만 이같은 선의도 도마에 올랐다. 지난해 5월 쿠팡 부천물류센터에서 확진된 직원의 배우자가 감염돼 1년 넘게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쿠팡과의 최종 협상은 21일 결렬됐다. 현 산업재해 제도는 배우자까지 산재 대상으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김 창업자는 미국인이라는 이유로 동일인(재벌총수) 지정에서도 벗어나 법적 책임을 피했다. 그렇다고 대기업 규모로 몸집이 커진 기업이 사회적 책임까지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김 창업자는 “쿠팡 없이 어떻게 살았을까”라고 고객에 묻는 대신 “고객 없는 쿠팡은 어떻게 될까”를 되새겨봐야 할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