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창작 초연 만나며 생긴 '책임감'…"허투루 말하는 대사는 없다"
1922년 일본 유학생들이 펴낸 잡지 '조선청년'에 22세 박열이 기고한 시다. 비록 양반의 가랑이 아래서 오줌을 맞을 수밖에 없는 보잘것없는 존재이지만, 양반의 다리에 똑같이 오줌을 갈길 수 있는 패기를 지닌 XXX는 박열 자신을 말한다.
"높은 이들이 나를 억압할 때 나도 그들의 다리에 오줌이라도 갈길 수 있는 자가 되고 싶은 박열의 마음을 고스란히 느꼈습니다."
배우 김재범이 14일부터 뮤지컬 '박열'로 관객을 만난다.
뮤지컬 '박열'의 배경은 이준익 감독의 동명의 영화와 같다. 간토(관동) 대학살이 벌어진 1923년 일제의 만행을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해 목숨을 걸고 투쟁한 박열과 그의 동지이자 연인 가네코 후미코의 실화를 다룬다.
관동 대지진으로 민심이 폭발 직전에 이르렀을 때 일제는 폭동을 막고 천황 중심의 권력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는 유언비어를 퍼트린다. 이로 인해 6000명이 넘는 조선인이 무자비하게 학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일본은 이를 무마하기 위해 '공공의 적'으로 항일운동단체 '불령사'에 소속된 박열을 황태자 암살 사건을 주도한 대역죄인으로 체포한다.
김재범은 캐릭터 구축 과정에서 영화를 참고하진 않았다.
"영화를 보면 자꾸 영화의 장면만 생각나고, 대본 안에 나오지 않은 부분도 영화로 채워지게 될 거 같아요. 제가 표현하지 않은 것도 충분히 설명했다고 생각해버릴 것 같아요. 무대를 올리고 난 후 보려 합니다."
박열은 거칠고 불같은 성미를 지녔지만, 일본 판검사를 골릴 정도로 유머가 넘치는 인물로 알려졌다. 김재범 역시 이 지점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불의의 시대에 온몸으로 맞선 청년 독립운동가 박열의 당당함은 내면의 갈등 없이 나왔을지, 두려움 속에서도 행했는지 등을 생각하고 있다.
"비중에 대해 고민하고 있어요. 자신이 죽음으로써 민중이 일어날 수 있다면 좋겠다는 마음도 있겠죠. 하지만 결정하기까진 분명히 용기가 필요했을 거라 생각합니다. 용기와 두려움을 어떻게 가져갈지 생각하고, 많은 가능성을 둔 채 결정하려 합니다."
박열과 후미코 외에 도쿄재판소 검사국장으로, 박열을 통해 업적을 세우려는 야망가 '류지'도 출연하는 3인극이다.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할 때 응당 그려지는 '정의로운 조선과 사악한 일본'이라는 프레임이 박열에서도 보이는지에 대해 물었다.
"세 인물의 시점이 함께 가요. 한 명에 몰려있지 않습니다. 류지는 이 사건을 꾸몄지만, 그 또한 더 큰 연극의 꼭두각시일 뿐이에요. 다만 류지도 일본인인데 '악'으로 표현되진 않아요. 그도 희생양일 수도 있기 때문이죠. '일본 대 조선'이라는 느낌보다 지배층과 민중 간의 갈등이라는 측면이 많이 보일 것 같아요. 시대적 배경을 떠나 어디에서나 있는 갑과 을이 '박열'에 담겼습니다."
뮤지컬 '박열'은 신예 이선화 작가의 입봉작이다. "보자마자 너무 재밌게 읽었어요. 요샌 대본들이 개성이 확실해서 신인 작가라고 비교할 건 없어요. 다만 비장한 면이 있는 거 같아요. 담담하게 자신의 사상을 이야기하는 박열을 봤을 때 비장하면서도 비장한 척 하지 않는 느낌을 받았어요."
데뷔 17년 차를 맞은 김재범은 그간 수많은 창작 초연 작품을 만났다. 한 작품의 시작을 장식한다는 것에 대한 설렘과 두려움을 오래도록 느끼고 있다. 시간이 흐르면서 행동도 많이 바뀌게 됐다. 혈기왕성했던 시절엔 자신이 생각한 의견을 관철하기 위해 스태프, 배우와 부딪히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이젠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살려고 한다는 그다.
"제가 잘하지 못하면 작품이 더는 빛을 보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 때문에 책임감이 커요. 그래서 제가 내는 의견이 작품의 방향으로 이어질 수 있어서 시간이 지날수록 조심스러워지게 돼요. 지금 생각하면 제가 순수하게 작품만을 위해 그랬을지도 생각하게 돼요. 제 캐릭터를 돋보이기 위함은 아니었을까요?"
연극계에서 김재범은 캐릭터 분석에 상당히 많은 공을 들이는 배우로 유명하다. 배우 김수로는 김재범은 '연기 천재'라고 말하기도 했다.
"'왜'에서 출발해요. 한 사람의 일생이 1시간 50분 안에 압축되다 보니 작품 안에서 허투루 말하는 부분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왜 그러한 행동을 했으며 이 장면에서 이 인물이 원하는 것은 무엇일지 집요하게 찾아내는 편이에요."
김재범은 9월 12일까지 '박열'로 살아갈 예정이다. 그는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과 타협하며 살아가는 사람들과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았던, 말도 안 되는 것들과 싸웠던 박열의 삶을 진지하게 들여다보고 있다.
"제가 박열이었어도 그런 용기가 있었을지 생각하면, 쉽지 않을 거 같아요. 부조리와 타협하지 않고 맞서 싸워서 이겨내려 했던 박열의 용기를 본받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