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과 금융위원회가 가상자산을 제도권으로 편입하려는 행보를 보이는 가운데, 관련 주도권을 선점하려는 예탁결제원과 민간 거래소의 물밑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다. 예탁결제원은 가상자산을 증권형 토큰(STO)으로 취급해 관리하려는 움직임을, 민간 거래소‧기업은 디지털자산거래소를 설립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어 향후 갈등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한국은행의 중앙은행 디지털화페(CBDC) 관련 자문을 맡은 적 있는 한 전문가는 “(CBDC가 출범한 만큼) 앞으로 혁신‧디지털 금융으로 넘어가는 건 명약관화”라며 “우리나라는 기본적으로 규제 스탠스인 만큼, 누가 규제를 선도할 것이냐에 대한 경쟁이 있다”라고 말했다.
한국은행은 지난 5월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 모의실험 연구’ 용역을 발주했다. 미중이 디지털 달러‧위안화로 경쟁에 나선 가운데 통화주권을 지키기 위한 행보로 풀이됐다. 국내 지급결제 부문에 CBDC를 도입하는 데 제도적‧기술적 필요사항은 없는지 선제적으로 살펴보는 사업이다. 사업 규모가 49억 원으로 크진 않지만 중앙은행이 가상자산이 제도권으로 편입 가능한지 점쳐보는 시도인 만큼 다수의 IT‧빅테크 기업이 용역에 참전했다.
금융위 또한 증권형 토큰(STO, Security Token Offering)을 들여다보고 있다. STO는 코인 발행사에 대한 소유권을 가지고 있어 주식과 유사하다. 이용자는 코인 발행사가 창출한 이윤의 일부를 배당금 등으로 받을 수 있다. STO의 증권성이 인정될 경우 증권신고서를 사전에 신고해 금융위의 인가를 받아야 한다.
업계 관계자는 “STO의 경우 기존 자본시장법을 적용할 수 있다”라며 “금융위가 증권사, 또는 은행이 (가상자산을) 처리할 수 있도록 기존 법 테두리 내에서 검토를 하려다 보니 이쪽으로 준비하고 있지 않겠나”라고 설명했다.
금융당국의 움직임에 업계 관계자들도 분주히 움직이는 중이다. 최화인 금융감독원 블록체인발전포럼 자문위원은 “CBDC 자체에 자동이자지급이나 사용처‧사용기간‧보유량 설정 등 정책 기능이 있어 시중은행과 예탁결제원 등이 대규모 구조조정을 맞을 수밖에 없다”라며 “세계적인 추세인 만큼, 본인들의 생존수단을 찾기 위한 출구 모색”이라고 평가했다.
특히 가상자산 거래소‧블록체인 업체들은 블록체인 특구가 있는 부산시에 디지털자산거래소 설립을 적극 주문하는 중이다. 지난해 빗썸은 가상자산 거래 주문을 지원하는 통합거래소를 특구 사업으로 추진했지만 최종 선정에서 고배를 마시기도 했다. 최근 부산시는 비트코인을 비롯해 STO, NFT 등 가상자산을 취급할 수 있는 거래소를 설립, 거래 지원에 나서겠다는 구상이다.
특히 부산시는 관련 연구를 시작하며 구체적 준비에 박차를 가하는 모습이다. 지난달 23일 부산시 산하 부산산업과학혁신원(비스텝)에서 ‘부산 디지털자산 구축을 위한 연구’를 시작했다. 지난 보궐선거 당시 김영춘‧박영준 부산시장 후보 모두 부산에 통합거래소 설립을 공약한 만큼 적극 나서는 모양새다.
해당 업무를 담당하는 부산시 관계자는 “아직 의견 수렴 단계고 방향을 조정하고 있다”라고 선을 그었다.
한편 예탁결제원 또한 자체 STO 용역을 수주하면서 주도권 경쟁에 나서고 있다. 예탁결제원은 2019년 9월 전자증권제 시행 이후 전자증권을 역점 사업으로 삼아왔다. 종이로 된 주식과 사채 등 실물 증권이 사라졌는데, 해당 증권을 전자로 처리할 수 있는 유일한 ‘전자등록기관’이라서다. 업계는 예탁결제원이 증권의 보관, 매매거래에 따른 결제, 보관 중 발생하는 권리 등을 관리하는 기관인 만큼 향후 STO를 전면 관리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가늠하고 있다.
실제 예탁결제원은 지난해 12월 ‘STO 플랫폼 개념검증 수행사업 제안요청서’를 작성, 올해 3월 나라장터를 통해 관련 용역을 공고했다. 소액공모, 장외파생상품 등 다른 비상장 증권으로 확장 가능한 시스템을 설계하고, 뱅크‧거래소 시스템 구축에 나서는 등 적극 나서는 모양새다.
STO 관련 서비스를 준비 중인 업계 관계자는 “부산시에서는 대체거래소로 뚫으려고 하고, 금융위는 기존 금융권을 활용하려는 분위기”라며 “예탁결제원은 자기들 단독으로 자체적으로 관리하겠다 고집하는 입장”이라고 설명했다.
금융위 관계자는 “(디지털자산거래소와 예탁결제원의 신경전에 대해) 아무래도 그렇지 않겠나”라면서도 “(두 주체 간) 경쟁이 가능할 지 모르겠고, 규모에서 차이가 날 것 같다”라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윤석빈 서강대 지능형 블록체인 연구센터 산학협력 교수는 “본래 STO는 기초자산이 없는 스타트업이 바로 증권형 IPO를 할 수 없는 만큼, 혁신 아이디어를 받아줄 산업 진흥으로 쓰여야 한다”라며 “본질이 아닌 본인들 행정 편의 위주로 생각하는 측면이 있다”라고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