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 강제징병으로 전쟁범죄자(전범)가 됐지만 정부가 보상 등 피해 회복을 위해 노력하지 않았다며 피해자들이 낸 헌법소원이 각하됐다. 헌재는 국제전범재판소 판결을 존중해야 하는 점 등을 고려하면 이들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등과 동일하게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헌법재판소는 31일 전범 생존자들의 모임인 동진회 회원들과 유족들이 정부의 부작위(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음)가 기본권을 침해한다며 낸 위헌확인 사건에서 재판관 5(각하)대 4(위헌) 의견으로 각하했다.
A 씨 등은 일제강점기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포로감시원으로 강제동원돼 동남아시아 각국에 위치한 포로수용소에서 근무하다가 종전 후 국제전범재판에 회부돼 BㆍC급 전범으로 처벌받았다.
이들은 자신들이 일본에 대해 가진 배상청구권이 한국과 일본 사이에 체결된 협정에 의해 소멸됐는지를 두고 양국 간 해석상 분쟁이 있는데도 정부가 이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는다며 헌법소원심판을 청구했다.
정부는 1965년 6월 일본과 ‘대한민국과 일본 간의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을 체결한 바 있다. 한일청구권 협정 3조는 협정의 해석과 실시에 관한 분쟁이 있으면 외교 등으로 해결하도록 규정한다.
그러나 헌재는 “국내의 모든 국가기관은 헌법과 법률에 근거해 국제전범재판소의 국제법적 지위와 판결의 효력을 존중해야 한다”며 각하 결정했다.
헌재는 “국제전범재판소 판결에 따른 처벌을 받아 생긴 한국인 전범의 피해 보상 문제를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원폭 피해자 등과 동일한 범주로 보고 이 협정의 대상이 된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앞서 헌재는 2011년 8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배상청구권을 놓고 한일 양국 간 분쟁이 있음에도 정부가 이를 해결하기 위해 구체적인 노력을 하지 않는 것은 위헌이라고 판단한 바 있다.
헌재는 이들에 대한 일본의 강제동원으로 인한 피해 부분은 “일본의 책임과 관련해 양국 사이에 협정 해석 등 분쟁이 현실적으로 존재한다고 결론 내리기 어렵다”고 봤다. 정부가 분쟁 해결 절차에 나아가야 할 의무가 인정된다고 보기 어렵다는 취지다.
이에 대해 이석태·이은애·김기영·이미선 재판관은 각하 의견에 찬성하면서도 “일제의 불법적인 강제동원으로 인한 피해 부분에 대해서는 정부가 분쟁 해결 절차에 나아가지 않은 부작위가 있어 위헌”이라고 반대 의견을 냈다.
이들 재판관은 “정부의 작위의무이행을 통해 일본이 법적 책임을 다하도록 함으로써 이를 역사적 교훈으로 삼아 다시는 비극적 상황이 연출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한 국익에 부합하는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