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 유로존 위기 잠재운 ECB 총재, 조국 이탈리아의 ‘구원투수’도 성공할까
중앙은행장의 말 한마디가 막강한 힘을 지녔음을 피부로 느낀 적이 있다. 바로 유럽중앙은행(ECB)의 마리오 드라기(Mario Draghi) 총재로부터다.
2012년 상반기, 당시 단일화폐 유로존은 세계 경제 위기의 진앙지였다. 2년 전 그리스로부터 시작된 경제위기가 아일랜드와 포르투갈, 스페인(PIGS, 피그스) 등으로 확산됐다. 회원국의 공동 대응이 너무 늦고 미미했기에 유로존의 붕괴가 자주 전망됐다. 이때 드라기 총재의 발언이 이 모든 것을 일거에 잠재웠다.
“유로 수호 위해 모든 조치, 날 믿어 달라”
“유럽중앙은행의 임무 안에서 단일화폐 유로를 수호하기 위해 어떤 조치든 기꺼이 취하겠다. 충분할 조치가 될 것이다. 나를 믿어 달라.”
2012년 7월 26일 드라기 총재는 런던에서 개최된 글로벌 투자회의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발언 후 ECB는 경기를 활성화하기 위해 막대한 자금을 시중에 풀었고(양적완화), 경제가 취약한 일부 유로존 회원국의 국채를 자금시장에서 매입하는 계획을 발표했다.
이 발언과 뒤따른 정책 효과를 국제 투자자들은 신뢰했다. 이 정책 실시로 드라기 총재는 ‘슈퍼 마리오’라는 별명을 얻었다. 유로존의 최대 경제대국이었던 독일을 비롯해 프랑스 등 회원국들이 적극적으로 재정을 풀지 않았기 때문에 중앙은행이 구원투수로 나섰다.
2019년 10월, 8년 임기를 마치고 퇴임했던 드라기 전 ECB 총재가 다시 구원투수로 등단했다. 경제위기에 빠진 조국 이탈리아를 구하기 위해서. 총리 취임 7개월째, 그의 개혁은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 중이다.
극우 포퓰리스트 정당도 참여한 통합정부의 총리
마리오 드라기가 이끄는 통합정부는 2월 13일 출범했다. 오성운동 및 민주당과 같은 중도좌파는 물론이고 반이민, 반이슬람과 반유로를 앞세웠던 포퓰리스트 우파 정당 ‘(북부)동맹’도 이 통합정부에 합류했다.
북부동맹은 유럽연합(EU)의 긴축정책을 비판하며 ‘유럽’과 각을 세웠던 정당이다. 그런데 EU가 지난해 7월 7500억 유로(우리 돈으로 약 1000조 원)의 경제회생기금을 마련하고 이탈리아가 최대 수혜국이 될 듯하자 마음이 바뀌었다. 경제위기 극복에 동참해 유권자의 지지를 더 받아보자는 셈법에서 북부동맹은 드라기 총리의 연립정부에 참여했다.
관광대국 이탈리아의 경우 경제에서 관광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약 13%. 코로나19가 터지기 전인 2019년의 경우 9400만 명 정도가 이 나라를 방문했다. 인구의 1.5배 정도다.
팬데믹은 이탈리아 경제에 직격탄이 됐다. 지난해 경제성장률은 무려 마이너스 8.9%를 기록했다.
그런데 드라기 취임 후 현재 이탈리아 경제는 순항 중이다. 기저 효과가 있지만 올해 약 5.7% 경제성장률이 예상된다. 코로나19 백신 접종률이 8월말 현재 70%를 넘었다. 지난 4월부터 봉쇄도 점차 해제되면서 경제가 되살아났다.
외국인 투자자들도 이탈리아의 경제개혁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EU에서 독일 연방정부의 국채 분트(Bund)는 다른 국가의 국채와 비교가 되는 기준이다. 분트 10년 만기 국채의 금리와 이탈리아 동일 만기물 국채의 금리 격차(스프레드)가 드라기 취임 후 계속해서 좁혀졌다. 1년 전 이 격차는 1.56% 정도였으나 이달 2일 현재 1.16%를 기록했다.(그래프 참조) 즉, 외국인 투자자들이 이탈리아 경제를 점차 신뢰하기에 이 격차가 좁혀지고 있는 것이다.
독일-프랑스와 함께 ‘빅3’의 하나로 EU 리더십 발휘 계기
대외 환경도 이탈리아에 유리한 편이다. 영국이 EU에서 탈퇴함에 따라 경제력과 외교력을 기준으로 이탈리아는 독일, 프랑스에 이어 EU의 주요 3개국(빅3)이다.
독일과 프랑스가 유럽통합을 주도해왔지만 두 나라 모두 국내 정치에 불확실성이 상존한다. 지난 16년간 유럽통합을 이끌어왔던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9월 26일 총선을 끝으로 정치 일선에서 물러난다. 독일 내 주요 3개 정당의 지지율이 엇비슷해 연정 구성에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프랑스의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도 내년 4월에 선거가 예정돼 있어 재선에 전력 질주해야 하기에 유럽 무대에서 리더십을 발휘할 여지가 적다.
이탈리아는 올해 주요 20개국(G20) 회의의 의장국으로 10월 30~31일에 정상회담을 개최한다. 드라기 정부는 이 행사를 국격 제고에 최대한 활용할 듯하다.
구조개혁·연금개혁 등 산적한 과제
이처럼 대내외적인 유리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구조개혁은 쉽지 않다. 중장기적으로 일관된 정책 집행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올해 73세인 드라기 총리의 개혁이 성과를 거두고 있는 것은 이탈리아에서 개혁에 대한 공감대가 있다는 점, 또 국민의 신뢰를 받는 그가 총리로 취임해 통합정부를 구성할 수 있었다는 점이 작용했다. 대외적으로 긴축 일변도이던 EU 정책이 팬데믹 때문에 대규모 경제부양책으로 바뀌었다는 점도 드라기에게 도움을 줬다. 문제는 오랫동안 일관성 있는 정책 시행이 필요한 구조개혁의 성공 여부다.
세계은행의 기업하기 좋은 국가 순위(2020년)에 따르면 이탈리아는 190개 국가 가운데 58위로, 동유럽의 폴란드나 헝가리보다 한참 뒤처진다(우리나라는 5위). 기업 규제가 많고 시장 진입 장벽이 꽤 높다. 투자를 유치해 일자리를 만들려면 이런 규제를 풀어야 한다. 하지만 규제로 이익을 보는 단체들의 반발이 만만치 않다.
연금개혁도 쉽지 않다. 이탈리아는 국내총생산(GDP)의 16% 정도를 연금으로 지출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그리스 다음으로 이 비중이 높다. 연금 지급액을 줄여야 한다. 역대 정권도 연금개혁을 계속 시도했지만 워낙 반발이 커서 실패했다.
총리직 더 복무 후 대통령 전망까지
이탈리아 경제는 2007년부터 사실상 성장하지 않았다. 저성장과 낮은 생산력, 높은 국가부채라는 최악의 3박자가 결합됐다. 2018년 자료에 따르면 상사분쟁 해결에 평균 514일이 걸린다. EU 27개 회원국 가운데 최장 기간이다.
EU 회원국 간에는 상품이나 서비스, 노동과 자본이 자유롭게 이동된다. 하지만 이탈리아에서는 너무 행정이 더디고 일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는 인식이 팽배하다. 따라서 독일이나 네덜란드 기업들은 이곳에 직접 투자하기보다 본국에서 상품이나 서비스를 판매하는 게 오히려 이익이 된다고 본다.
이탈리아 총선은 2023년 봄에 예정돼 있다. 세르지오 마타렐라 대통령 임기는 내년 봄에 종료된다. 연임이 가능하나 현재 80세의 고령이라 일부에서는 드라기 총리가 차기 대통령으로 물망에 오른다. 이탈리아 경제의 구조개혁을 관철하기 위해서 드라기가 총리로 더 복무하고 2023년에 대통령이 되는 게 최적이라는 전망도 조심스레 나온다. 어쨌든 구조개혁 성패 여부가 이탈리아는 물론이고 ‘유럽’의 대외 경쟁력 강화에도 매우 중요하다. 개혁에 유리한 ‘기회의 창문’은 항상 열려 있는 게 아니다.
팟캐스트 ‘안쌤의 유로톡’ 제작·진행자, ‘하룻밤에 읽는 영국사’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