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로부터 며칠 뒤, 40여 년 전통의 미국 코미디 쇼 ‘SNL(Saturday Night Live)’에서는 여지없이 이날 토론회 패러디가 무대에 올랐다. 한때 섹시 가이의 대명사였던 배우 알렉 볼드윈과 익살 연기의 대가인 짐 캐리가 각각 트럼프와 바이든 분장을 하고 나와 대선 후보들의 첫 TV 토론회를 재연했다.
막무가내식 끼어들기와 조롱으로 일관하던 트럼프와 이에 휘말리지 않으려 용을 쓰던 바이든을 연기하는 배우들의 능청에 방청객들은 내내 폭소를 터트렸다.
특히 백인 우월주의 관련 토론에서 모르쇠로 일관한 트럼프와 대통령으로서 자신의 비전을 똑바로 보여주지 못한 채 러닝메이트 카멀라 해리스의 치마폭에 싸여 있는 듯한 바이든을 비꼰 대목에선 그 어느 장면보다 폭소가 강하게 터져 나왔다. 진짜 토론은 엉망진창이었지만, 이를 패러디 한 블랙 코미디만큼은 최고였다. 해당 영상의 유튜브 조회 수는 3200만 회가 넘었다.
최근 국내에서는 한동안 자취를 감췄던 공중파 코미디 프로그램이 되살아날 조짐이다. 공중파에서 설 곳을 잃고 새로운 생업을 찾아 나섰던 개그맨들이 ‘개승자’라는 개그 서바이벌 프로그램으로 다시 뭉쳤다. 개그 프로 전성기 때 일찌감치 유명세를 탄 개그맨들은 다양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입담꾼으로 자리 잡았지만, 그렇지 못한 이들은 다른 생업을 전전하다가 불려 나왔다. 이들이 경연을 펼칠 때마다 마지막 기회라는 결연한 각오가 엿보였다.
하지만, 시대가 달라졌다. 바보 연기, 인기 TV쇼 패러디 등 예전 같았으면 자지러지고도 남을 아이템들에도 여간해선 시청자들의 웃음보가 터지지 않는다.
왜일까. 그 이유는, 매일 보는 정치 현실이 그 어떤 코미디 프로그램보다 재미있어서일 것이다. 현재 이재명, 윤석열 두 유력 대선 주자를 둘러싼 상황이 특히 그렇다. 자칭·타칭 전과 4범이라는 사람이 여당 대선 후보가 된 것, 그리고 27년간 검사 일만 하던 사람이 하루 아침에 제1 야당의 대선 후보가 된 것이 그렇다.
이들을 둘러싼 잡음도 끊이지 않는다. “출신이 비천해 주변에 더러운 게 많다”는 이 후보는 아들이 불법도박과 성 매매 의혹에 휩싸인 상황이고, 윤 후보는 아내의 경력 위조 의혹 탓에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인 ‘공정과 상식’ 명분이 무색해졌다.
이 외에 블랙 코미디로 만들어져 무대에 오른다면 시청자들이 박장대소할 에피소드들이 무궁무진하다. (이렇게 핫하고 신박한 아이템들을 피해가려니 정통 개그가 재미 없을 수밖에.)
물론, 이 정치 개그의 ‘넘사벽’에 업자들이 도전을 안 한 건 아니다. 개그맨들로 구성된 일부 공중파 예능에서 ‘대선 주자 특집’이라며 거물들을 불러다 ‘검증’을 시도했다.
그러나 약해도 너무 약했다.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얘기를 소환한 감성 팔이와 자기 홍보의 장으로 활용하려는 대선 주자들의 능수능란함에 MC들은 그저 애교로 일갈했다. 대선 주자들의 국정 운영 철학이나 정책 현안, 각 후보가 휘말린 사건 등에 대해 허를 찌르는 질문은 없었다.
국내 신규 OTT로 넘어간 SNL코리아에서 ‘날것’으로 화제가 됐던 인턴 기자 코너도 한계는 있었다. 이 코너 역시 유력 대선 주자들을 만나 인터뷰를 했지만, 인터뷰이보다 인터뷰어 자신만 부각하는 식이었다. 정치 풍자 코미디를 표방하면서 “정치 풍자 코미디를 할 수 있게 보장해주겠느냐”는 질문에는 실소가 터졌다.
이게 우리나라 코미디 현실이다. 블랙 코미디를 하려면 유력 정치인과 그들의 맹신적 팬덤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대선이 70여 일, 코앞이다. 후보들은 비방전을 자제하고 정책 선거로 방향을 틀어야 한다. 상대편 후보 주변 흠집 내기는 결국 ‘상대편 후보는 완전무결하다’는 아이러니만 부각시킬 뿐이다. 정치인들의 쌈마이 4류 코미디에 국민은 지칠 대로 지쳤다. 이제 코미디는 코미디언들에게 맡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