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계 스포츠 특성상 미세한 차이로도 큰 실수가 벌어지거나 격차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이에 선수들은 빙질, 설질 등 경기장 환경에 예민한 모습을 보인다. 선수들이 사용하는 장비도 마찬가지다. 선수들은 자신에게 맞는 최적의 장비를 찾는다. 경기 내내 함께하는 장비들은 환경보다 더 성적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볼 수 있다.
2022 베이징 동계올림픽에서도 이런 이유들 때문에 울고 웃는 선수들이 나왔다.
이번 올림픽 쇼트트랙에서 편파판정 이전에 가장 우려되던 요소는 ‘빙질’이었다. 매번 달라지는 경기장 빙질에 선수들도 적응하기 어렵다는 반응이었다.
황대헌(강원도청)은 지난 1일 대회 전 훈련을 마친 뒤 “빙질의 성질이 계속 변한다. 어제는 잡아줬는데 오늘은 잡는 느낌이 없다”며 빙질에 대한 불안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실제 대회 초반 많은 선수가 경기 중 넘어지며 빙질에 적응하지 못하는 모습이 속출했다. 한국 대표팀도 마찬가지였다. 혼성 계주에서는 박장혁(스포츠토토)이 넘어졌고, 여자 500m 준준결승에서는 최민정(성남시청)이 넘어지며 준결승에 진출하지 못했다.
최민정은 여자 500m 경기 직후 “빙질에는 크게 이상이 없는 것 같다”고 말했지만, 말끝을 흐리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이에 일각에서는 장비 담당 코치 부재 문제를 거론한 것이라 유추하기도 했다. 이번 올림픽에서 한국 쇼트트랙 대표팀은 장비 코치를 동반하지 않았다. 연맹 측은 “최민정이 올림픽 직전 장비 담당 코치를 요구했지만, 올림픽 코치진 구성이 확정돼 손을 쓸 수 없었다”고 밝혔다.
빙질에 맞게 날을 손볼 수 있는 장비 전문 인력이 있었다면 넘어지는 변수를 줄일 수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나온다.
스피드스케이팅 남자 500m 은메달리스트 차민규(의정부시청)는 최근 대회에서 부진한 모습이었지만, 장비 문제를 해결하면서 은메달을 거머쥐었다.
지난해 11월~12월에 열린 국제빙상경기연맹(ISU) 월드컵에서 단 한 번도 입상하지 못했던 그는 골반 부상 재활과 스케이트 날 문제로 부진을 겪고 있었다.
그러나 평창동계올림픽 당시 장비 담당 코치로 활동했던 장철 코치의 도움을 받아 스케이트 날을 정비했다. 고된 훈련과 장비 문제 해소로 기량을 끌어올린 차민규는 올림픽 2연속 은메달이라는 위업을 달성했다.
차민규도 “뒤늦게 스케이트 날이 제대로 잡혔다”며 장비가 큰 영향을 줬음을 인정했다. 그는 “월드컵 시리즈 때부터 완벽한 장비로 경기에 임했다면 여러 준비 과정을 거쳐 더 좋은 성적을 냈을 것”이라며 아쉬움을 드러내기도 했다.
해외에서도 장비 문제 지적이 나왔다. 2014 소치, 2018 평창 올림픽 여자 스켈레톤에서 2연속 금메달을 따는 등 꾸준히 강세를 보이던 영국은 이번 올림픽에서 2연패의 준인공 리지 야놀드가 은퇴했지만, 평창 대회 동메달리스트 로라 디즈 등의 활약을 기대했다. 그러나 디즈는 최종 19위에 그쳤다.
또 다른 대표 선수 크로울리 브로건도 전체 2번째로 빠른 스타트(5.04초)를 기록했으나 23위로 4차 주행도 하지 못했다. 남자 종목도 매트 웻슨과 마커스 와이어트가 15, 16위로 머물며 입상에 실패했다.
충격적인 부진에 대해 BBC 해설 존 잭슨은 썰매가 문제라고 지적했다. 2014 소치 대회 동메달리스트인 그는 “영국제 썰매가 속도를 떨어트린다”며 “이는 썰매 설계자가 잘못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리지 야놀드 역시 “영국에 전용 트랙이 없는 등 여러 요소가 있지만, 장비도 문제”라고 말했다.
브로건도 주행 직후 “썰매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겠다”며 “썰매에 속도가 붙지 않는다”고 토로했다.
스켈레톤을 비롯한 봅슬레이, 루지 등 썰매 종목은 장비가 특히 중요한 종목으로 여겨진다. 1초 안에 순위가 갈리는 만큼 무게 중심 조정이나 바람의 저항을 덜 받을 수 있는 작은 요소들이 적지 않은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썰매 종목은 자동차 제조사들의 기술 경쟁 각축장이기도 하다. 독일이 썰매 종목에서 강세를 보이는 이유 중 하나로 BMW가 썰매 제조 부문을 선도하며 적지 않은 지원을 하고 있는 것이 지목되기도 한다.
한국에서도 현대자동차가 2018년 평창 올림픽 당시 봅슬레이 제작에 나선 바 있다.
익숙한 장비에서 오는 심리적 안정감도 성적에 영향을 주는 것으로 보인다. 베이징 올림픽 한국 스켈레톤 대표로 출전한 윤성빈(강원도청)은 이번 대회에서 트레이드마크인 ‘아이언맨’ 헬멧을 쓰지 못한 채 레이스에 나서야 했다.
이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 규정 때문이다. 올림픽과 무관한 상표 로고 회사 디자인 등 상징적인 표식이 노출되면 안 된다는 규정으로 인해 ‘마블 코믹스’를 연상시키는 헬멧을 쓰지 못 하게 한 것이다.
윤성빈은 베이징에 입국한 뒤 연습 주행을 할 때까지도 이러한 내용을 알지 못했고, 대회 3일 전인 7일에서야 헬멧 교체를 요구받았다고 한다. 이에 윤성빈은 아무 무늬가 없는 예비 헬멧을 쓰고 경기에 임했다.
성능과 크기는 본래 쓰던 헬멧과 차이가 없었지만, 윤성빈은 레이스 후 “8년 만에 (아이언맨 헬멧을) 못 쓴 것 같은데 어색하다”, “시합하는 느낌이 안 든다”며 불편함을 호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