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봤던 동화 속 마지막 페이지에 적힌 마지막 문장. 그 ‘오래오래’와 ‘행복하게’에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숨겨져 있을까 싶지만, 그래도 따뜻하게 끝나는 마무리 중 이 문장보다 알맞은 건 없을 것 같은데요. 비록 낡고도 진부한 결말일지라도 이야기 속 인물들을 잘 떠나보낼 수 있는 ‘배려’가 함께하죠.
그런데, 최근 그 ‘배려’를 찾아볼 수 없는 드라마를 향한 분노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3일 종영한 tvN 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 이야기인데요. IMF 시기 청춘들의 이야기를 그렸던 이 드라마는 최고 시청률 12.6%를 기록하며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IMF 시기를 정통으로 맞은 고등학생들의 청춘과 꿈, 우정 이야기와 함께 백이진(남주혁 분)과 나희도(김태리 분)의 알콩달콩한 연애서사가 시청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죠.
고등학생과 대학생의 만남부터, 백이진과 나희도의 성장, 그 과정 중에 하나하나 채워진 감정들은 시청자들에게 그대로 전달됐고, 두 청춘남녀의 달달한 러브스토리를 응원했습니다. 당돌한 나희도의 고백도, 당황했지만 웃음을 감추지 못하던 백이진의 모습도 시청자들에게 ‘망상’을 심어주기 충분했는데요. 물론 초반 나희도의 중년 모습과 ‘백 씨’가 아닌 ‘김 씨’인 나희도의 딸 김민채의 이름이 공개되며 두 남녀가 이루어지지 못했을 것이란 암시를 주긴 했습니다. 하지만 16회나 진행되는 긴 이야기들이 남아 있었고, 15~16화 직전까지 둘의 끈끈한 관계는 ‘막판 반전’이 있으리라 의심치 않았는데요.
드라마를 보며 ‘망상’의 나래를 펼친 시청자들은 백이진이 어떤 이유에서건 성을 바꾸게 될거라며 ‘김백이진’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백이진이 입양된 아들이며, 친아버지의 성이 김 씨라는 가설이었죠. 백이진의 집에 있던 흰색 카세트와 나희도의 집에 있던 빨간 카세트가 김민채의 방에서 발견되며 ‘빼박’이라는 이야기에 신빙성이 더해졌죠. 소품 하나하나 장면 하나하나까지 캡쳐하며 ‘나희도 딸=백이진 딸’이라는 가설을 실제로 만들어갔는데요.
네, 결국 아니었습니다. 15화가 넘는 그 긴 시간 동안 써내려간 아름다운 청춘물은 서로의 ‘일’ 때문에 바빠져 ‘사랑해서 헤어진다’는 결론에 이르렀죠. 온 마음을 다해 사랑했고, 서로에게 배운 사랑이 자신들을 빛나게 했으며, 고마움이 가득하지만 헤어졌는데요.
‘펜싱 선수’ 나희도에게 상처 줄 수 있는 상황을 피하려고 UBS 방송국 ‘스포츠국’에서 다른 부서로 이동까지 했던 기자 백이진이 ‘뉴욕 특파원’을 지원하면서 나희도 곁을 떠났습니다. 힘듦도 함께 나누고 싶다던 순수남 백이진이 갑자기 기자다운 기자가 되고 싶다는 야망남이 되어 버렸죠. 서브 커플이었던 고유림(김지연 분)과 문지웅(최현욱 분)은 러시아와 한국이라는 머나먼 거리에도 불구 결혼으로 이어졌는데, 뉴욕과 서울은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두 사람이 쌓아 올린 사랑과 애정은 길었지만, 이별을 택한 서사와 인물들의 감정과 설득력이 너무 부족한 탓이었는데요. 이를 바라보는 시청자들에겐 ‘배려’ 없는 충격이었습니다. 그저 결혼으로 이어지지 않는 이별 때문이 아닌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들로 벌어진 결별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죠. 각자의 길을 택한 이유가 충분하지 않은 상황에서 둘을 응원했던 이들은 “마지막에 작가님이 어디 가셨나요?”라는 의문을 내비쳤는데요.
종영 후 일주일 가까이 된 현재까지도 “화가 난다”는 이야기들로 가득하죠. 비슷한 시기에 이런 ‘작가 교체설’이 나온 작품은 하나 더 있는데요. 같은 날 종영한 JTBC ‘기상청 사람들: 사내연애 잔혹사 편’입니다. 초반 이 작품은 기상청에서 자주 사용되는 단어와 현상들을 주제로 사람들 사이의 감정에 대입시키며 ‘신선하다’라는 평가를 받았는데요. 대학과 직장을 거치며 10년 넘게 연애한 커플이 상대방의 ‘환승 이별’로 갑자기 파혼, 이후 각자의 상대방과 결혼·연애를 하게 된다는 어마어마한 설정들이 초반에 몰아쳤습니다. 급박하게 진행되는 이야기의 속도감과 ‘기상청’이라는 새로운 장소, 또 ‘체감온도’, ‘환절기’, ‘가시거리’, ‘불쾌지수’ 등 기상청 보도에 자주 사용됐던 단어들이 펼쳐내는 소재가 시청자들의 구미를 끌어당겼죠. 거기다 박민영, 송강이라는 비주얼 커플의 연상연하 설정은 그저 보기만 해도 행복했는데요. 그런데 이 행복은 딱 4화까지였죠.
신선하던 이야기는 갑자기 ‘막장 소재’ 주인공 아버지의 등장, 각 캐릭터의 노답 설정으로 이어졌는데요. 극한 현실성도 극한 판타지도 아닌 모호한 전개 중에 더 답답한 캐릭터들의 행동이 속이 꽉 막힌 고구마를 안겼습니다. 결국, 시청자들은 “4화 이후 작가님이 교체됐나요?”, “혹시 작가님 무슨 일 생기셨나요?”라는 불만을 토로했죠. 사귀고 헤어졌다가, 과거 교제 사실이 까발려진 사내연애에서 고민하다 결국 상견례까지 이어지는 이해 못 할 과정들로 결말에 이르면서 ‘알 수 없는 기상청 사내연애’로 마무리됐습니다.
이처럼 배경 설정과 캐릭터의 서사에 맞춰 행복해하고 즐거워하고, 같이 울었던 시청자들에게 생각지도 못한 폭탄을 안기는 ‘배려’ 없는 결말 사례는 이전에도 있었는데요. ‘황당 결말’의 두 축 ‘파리의 연인’과 ‘지붕 뚫고 하이킥’이 있죠. “저 남자가 내 남자다 왜 말을 못 해!”, “애기야 가자!” 등 다양한 오글 유행어가 난무했던 ‘파리의 연인’. 재벌 남친과 캔디 여친의 진부한 설정에도 큰 사랑을 받았는데요. 두 사람의 멋진 나날을 응원하던 시청자들은 갑자기 ‘소설’이라는 황당한 결말을 떠안았죠. 같이 행복했던 그 모든 이야기는 여자 주인공의 소설 속 이야기, 한마디로 ‘뻥’이었단 거였는데요. 드라마를 시청했던 2~3달이 그저 ‘뻥’이었다는 설정은 두고두고 회자됐습니다. 시트콤 ‘지붕 뚫고 하이킥’도 마찬가지였는데요. 4명의 남녀주인공 사이 오가는 감정선에 두근거리며 각자 지지하는 커플을 응원했던 시청자들은 갑자기 죽어버린 이지훈(최다니엘 분)과 신세경(신세경 분)의 엔딩에 그저 멍해졌죠. 뻔하지 않은 결말을 그리고 싶었다는 김병욱 PD의 말처럼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결말’로 끝나버렸습니다.
시청자들이 꼭 ‘해피엔딩’을 바라는 것은 아닙니다. ‘새드엔딩’일지라도 그 모든 이야기가 마음에 꾹꾹 박힌다면 눈물 나는 엔딩에도 박수를 보내게 되는데요. 어딘가가 찝찝한 또 불편하게 결론지어버린 엔딩이 그저 야속하죠. ‘망상’이지만 드라마를 즐겼던 그 시간만큼 그 이야기 속 주인공들이 있을 법한 미래에도 ‘배려’가 함께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