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적 법관들이 목소리를 낸 것 자체에 의의"
전국법관대표회의에서 김명수 대법원장의 '코드인사'에 대한 문제가 제기된 만큼 '사법파동'이 시작되는 게 아니냐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다만, 회의가 큰 소득 없이 끝난 만큼 작은 소동으로 그칠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12일 법조계에서는 "사법파동이 되려면 아래에서부터 위로 목소리가 올라가 현 체제를 바꾸자는 말이 나와야 한다"며 "11일 열린 회의는 이에 미치지는 못했다"는 의견이 주를 이뤘다.
부장판사 출신 한 변호사는 "무슨 사법파동이냐, 아무 일 없이 넘어갈 것"이라며 "회의 결과도 원론적인 수준에서 그쳤는데 변화가 있지는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한 법원 관계자도 "전국에 판사 수가 매우 많아서 전국법관대표회의가 사법파동의 시작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라면서도 "그러한 의견이 주류는 아니다"라고 전했다.
반면, 다른 변호사는 "판사들이 목소리를 내는 것이 이례적인 일인 만큼 회의에서 인사에 대한 이의가 제기된 것 자체에 의미를 둬야한다"며 "사법파동 일지를 보려면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밝혔다.
전국법관대표회의에 대표 법관으로 참석한 다른 법원 관계자들은 대부분 말을 아꼈다. 사법파동이라는 말 자체에 대해서 법원에서 쓰는 표현은 아니라는 말도 나왔다.
또 다른 법원 관계자는 "사법파동은 법원 내부에서 개념 정의한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명명한 것"이라며 "그와 같은 목소리가 있었다는 것 자체가 중요할 뿐"이라고 말했다.
사법파동은 사법권 독립·개혁을 요구하며 발생한 판사들의 집단행동을 말한다. 1971년, 1988년, 1993년, 2003년 등 네 차례에 걸쳐 일어났었다.
1차 사법파동은 1971년 서울지검 공안부 검사가 서울형사지방법원 판사 등 3명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한 것이 발단이 됐다. 명목은 뇌물 혐의였지만 실상은 시국 관련 사건에서 무죄가 잇따르자 판사들을 통제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서울형사지법은 그날 오후 법관회의를 열었고 판사 37명이 사표를 일괄 제출했다. 뒤이어 전국 각지에서 판사 150여 명이 사표를 제출했고 '사법권 수호 건의문'이 작성됐다. 이에 박정희 당시 대통령은 검찰에 수사 중단을 지시했고, 판사들은 민복기 당시 대법원장 호소로 사표를 철회했다.
2차 사법파동은 노태우 정부때인 1988년 발생했다. 5공화국 당시 활동했던 사법부 수뇌부를 재임명한 것이 발단이 됐다. 전국 200여 명의 판사가 '새로운 대법원 구성에 즈음한 우리들의 견해'라는 성명서에 서명했고, 유신헌법 철폐, 판사의 청와대 파견 중지 등을 요구했다. 김용철 당시 대법원장이 사퇴하며 마무리됐다.
1993년 3차 사법파동은 '사법부 개혁에 관한 건의문'을 통해 전체 법관의 의사를 반영한 법관인사위원회 구성, 법원 인사권 분산, 전국법관회의 설치 등을 요구했지만 대부분 반영되지 못한 채 마무리됐다.
2003년 4차 사법파동은 남성·기수·서열에 따라 획일적으로 정해지는 대법원장의 대법관 제청에 반기를 든 사건이었다. 판사 144명이 연판장에 서명했고, 전효숙 당시 서울고법 부장판사가 첫 여성 헌법재판관으로 임명되며 일단락됐다.
2009년 신영철 당시 대법관이 촛불집회 재판 담당 판사들에게 이메일로 재판에 개입한 사실이 드러나 전국판사회의가 열린 것, 2017년 대법원이 판사들의 사법개혁 움직임을 저지한 사실이 드러나 생긴 반발을 사법파동으로 보는 시각도 있지만 주류는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