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봄날’ 이돈구 감독 “빨간잠바 입고 장례식장… 블랙코미디 같았죠”

입력 2022-04-26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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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 포스터 ((주)콘텐츠판다)
8년 동안 수감돼 있던 호성(손현주)이 아버지 장례식장을 찾는다. 큰아들이자 상주이지만, 출소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그가 할 수 있는 건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동네 ‘어깨들’이나 불러 모으는 일이다. 모처럼 만난 가족들과는 영 데면데면한데, 내내 퉁명스럽던 딸이 슬쩍 다가와 말한다. 아빠, 나 결혼할 사람 인사 온대.

아무리 제 역할 못한 아버지라지만 딸의 결혼 소식 앞에서는 납덩이 같은 짐이 내려앉은 듯 마음이 무겁다. 조직을 위해 희생한 왕년의 자신은 이미 이빨 빠진 호랑이다. 모로 둘러봐도 돈 될 사업에 낄 방법이 없는 호성은 고민 끝에 ‘참신한 일’을 벌인다. 장례식장을 조직원들의 도박판으로 탈바꿈하고, 아버지 앞으로 모인 조의금을 도박 자금으로 나눠주는 것이다. 흥에 겨워 쌈짓돈마저 오가다 보면 빌려준 원금을 넘어 이자까지 회수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그 계획이, 손쉽게 이루어질 리 만무하다.

철없는 아버지를 주축으로 벌어지는 장례식장에서의 3일간을 이야기하는 ‘봄날’은 이돈구 감독이 “아버지를 이해해보고 싶어서 만든 영화”라고 했다. 25일 서울 강남구 논현동에서 만난 그는 실제 “할아버지 장례식장에서 마주한 너무나 강렬한 블랙코미디 요소” 덕분에 ‘봄날’ 이야기의 뼈대를 구축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영화 '봄날'을 연출한 이돈구 감독이 25일 서울 강남구 논현동의 한 건물에서 이투데이와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조현욱 기자 gusdnr8863@ (이투데이DB)

“굉장히 진지해야 하는 상황인데 사람들이 실수를 하고, 소통이 잘 안되더라고요. 장례식장에 빨간 잠바를 입고 와서 3일 내내 술에 취해 계신 분도 있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가족들과 그렇게 친한 분이 아니었어요. 반전이죠. 그 자체가 블랙코미디 같았어요. 그런 와중에 축 처진 어깨로 분향소에 앉아 계신 아버지를 보니… 어떤 인물이 떠오르더라고요. 누군가를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그 상황이 어색하고 어설픈 한 남자, ‘봄날’은 거기에서부터 발전된 이야기입니다.”

이 감독은 본래 장르적인 작품을 다루는 데 능숙한 연출자다. 전작 ‘가시꽃(2012)', ‘현기증(2014)', ‘팡파레(2019)'를 두고 스스로도 “열 몇 명의 주인공들이 모두 괴로워하다가 죽는다”고 요약할 만큼, 한정된 공간 안에 갇힌 인물의 정서를 극단으로 밀어붙이고 잔혹한 사건을 벌이는 개성 있는 스타일을 선보여왔다.

‘봄날’에서는 그의 기질이 조금 다른 방향으로 발휘된다. 장례식장에 모인 조직원들끼리 질펀한 싸움이 붙고, 서로에게 실망한 가족끼리 고성이 오가지만 그 관계들이 완전한 파멸로 향하지는 않는다. 한심한 듯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애잔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주인공 호성 주변으로 따뜻한 마음씨와 유쾌한 웃음이 스며드는, 대중적인 드라마에 가까운 결과물이다. 빨간 잠바를 입고 나타났다는 할아버지 장례식장의 실제 인물은 극 중 호성의 친구 양희(정석용) 역으로 재탄생했다.

▲영화 '봄날'을 연출한 이돈구 감독이 25일 서울 강남구 논현동의 한 건물에서 이투데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조현욱 기자 gusdnr8863@ (이투데이DB)

한층 보드라워진 연출 방향의 변화를 묻는 말에 이 감독은 “여전히 장르 영화가 재미있지만, 전보다는 사람이 좀 차분해진 것 같다”고 했다. 그는 “영화 속 주인공이 더 이상 죽지 않는 것만 해도 ‘인생은 희망적’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어요. 그 변화만으로도 제게는 의미가 커요”라며 웃었다.

‘봄날’ 관람의 또 다른 재미는 소위 충청도식 유머와 사투리다. 주인공 호성 역의 손현주는 말할 때는 대수롭지 않은 듯 표현하지만 듣고 난 사람은 뒤늦게 무안함과 당황함을 느끼게 되는 ‘한 호흡 느린 디스’를 출중하게 소화하며 관객에게 웃음을 안긴다. 배우의 호연에 더해, 이 감독의 분명한 역할도 작용한 대목이다.

“손현주 선배님은 경상도, 전라도 사투리 연기에 비하면 충청도 사투리 연기는 그만큼 자신 있는 상태는 아니셨어요. 특유의 디테일과 리듬을 위해서 노력을 많이 해주셨죠. 대사를 하면 그걸 녹음해서 제가 듣고 계속해서 피드백을 드렸어요. 여기서는 (말끝을) 올리시고요, 여기서는 내리시고요, 하면서요. 연기 경력이 오래된 선배님을 두고 제가 그러고 있으니 ‘내가 뭐 하는 거지’ 싶어 웃기기도 했지만요.”

▲'봄날' 스틸컷 ((주)콘텐츠판다)

어린 시절부터 호성과 절친한 동네 친구인 양희 역을 맡은 정석용은 특히나 목소리 크고 오지랖 넓은 ‘찐’ 충청도 아저씨 역할로 관객의 웃음을 주도한다. ‘짝패(2006)' 출연 당시 충청도 사투리 연습을 해둔 덕을 ‘봄날’에서 톡톡히 봤다고 했다.

“정석용 선배님은 시나리오를 읽고 ‘이 사람은 무조건 목소리가 클 거다’고 하시더라고요. 리딩 때도 현장 촬영 때도 ‘이 장면에서 내가 좀 웃겨야 한다’는 개념이 전혀 없이 굉장히 진지하게 연기하셨어요. 그야말로 그 인물처럼 연기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재미있는 부분이 생겨난 것 같아요.”

▲'봄날' 스틸컷 ((주)콘텐츠판다)

이 감독은 ‘봄날’에서 가장 신경 쓴 지점으로 ‘원테이크 촬영’을 꼽았다. 장례식장 화장실 거울 앞에서 동생(박혁권), 아들(정지환), 주인공 호성이 순서대로 교차하며 대화하는 장면, 술에 취한 양희가 도박 중인 조직원들을 하나하나 훑어보는 장면을 대표로 꼽았다.

“최대한 컷을 나누지 않고 호흡을 쭉 이어가는 신이 몇 개 있어요. 사실 힘든 촬영이죠. 배우들의 합이 요구되기도 하고, 후반부에서 NG가 나오면 처음부터 다시 찍어야 하니까요. 그런데 배우 선배님들도 연극할 때 느낌이 나서인지 그렇게 찍는 걸 재밌어해 주시더라고요. 영화에서만 체감할 수 있는 앵글을 많이 사용하려고 했어요.”

이 감독은 촬영 현장에서 만큼은 “감독도 배우도 서로 고집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렇지 않으면 “작품이 헐거워진다”는 것이다. “배우가 동의하지 않으면 읍소하고, 설득하면서 원하는 장면을 얻어내기 위해 모든 걸 해야죠. 그렇지 않으면 (영화가 완성된 뒤에) 속상하거나 자괴감에 빠질 수 있거든요.”

장례식장에서 벌어지는 한바탕 소동 끝에, 주인공 호성은 행복한 결말을 맞을 수 있을까. 이 감독은 보는 사람이 결말부의 여운을 온전히 누릴 수 있도록 감독 자신의 해석도 ‘스포’도 없는 상태로 개봉하고 싶다고 당부했다.

‘봄날’은 27일 개봉한다. 15세 관람가. 러닝타임 1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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