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 루블화 가치 끌어올렸다가 공격적 금리 인하로 낮추고 있어
미국, 러 이자·원금을 상환하는 길목 완전 차단...디폴트 임박
에너지 협박도 조만간 약발 다할 것이란 분석
러시아의 최근 일련의 조치들이 다급해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상황을 시사하고 있다. 경제가 벼랑 끝에 몰리자 서방에는 제재 완화를 요구하는 듯한 제스처를 취하는가 하면 경기 방어를 위해 자국 통화 루블화 가치를 인위적으로 끌어올렸다가 다시 끌어내리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26일(현지시간)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이날 마리오 드라기 이탈리아 총리와의 통화에서 "식량과 비료 수출을 확대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명분은 글로벌 식량 위기를 내세우면서 전제 조건은 대러 제재 완화를 내걸었다.
크렘린궁은 성명을 내고 양국 정상의 통화 내용과 관련해 "푸틴 대통령은 서방의 제재가 해제된다면 러시아가 곡물과 비료 수출을 통해 식량 위기를 극복하는 데 크게 기여할 준비가 돼 있다고 강조했다"고 말했다.
앞서 안드레이 루덴코 러시아 외무부 차관도 전날 대러 제재가 해제되면 흑해 우크라이나 항구 봉쇄를 완화할 수 있다고 밝혔다. 루덴코 차관은 "곡물을 실은 선박이 우크라이나를 떠날 수 있도록 인도주의 통로를 제공할 준비가 돼 있다"면서 "식량 문제를 해결하려면 러시아 수출과 금융 거래에 부과된 제재 해제 등 포괄적인 접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미국은 러시아의 제재 완화 요구에 '어림없다'며 분명히 선을 그었다. 카린 장 피에르 백악관 대변인은 "미국과 서방 동맹국들이 러시아에 가한 제재는 우크라이나나 러시아의 식량 수출을 막는 것과 관련이 없고, 해운, 은행 등에서 수출에 필수적인 통상 거래를 막고 있지도 않다"고 말했다.
러시아가 이 같은 제재 완화 요구에 나선 것은 그만큼 자국 경제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 재무부가 러시아가 미국 투자자들에 이자나 원금을 상환하는 길목을 완전히 차단하면서 강제적으로 디폴트(채무불이행)에 빠질 위기에 내몰렸다. 러시아가 국채 원리금과 이자를 미국 채권자들에게 상환할 수 있도록 허용해온 유예 조치를 연장하지 않기로 했다고 밝혔다. 기존 유예 조치는 25일까지였다.
이런 가운데 루블화 가치는 롤러코스터 흐름을 보이면서 러시아 경제에 부담을 키우고 있다. 대러 제재 충격파에 폭락했던 루블화 가치는 러시아중앙은행의 시장 개입으로 2018년 이후 최고치를 기록하고 있다. 다우존스 데이터에 따르면 달러 대비 루블화 가치는 올해 들어 16% 상승했다.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저점 대비로는 150% 폭등했다.
통화 가치는 일반적으로 국가 경제 성장이나 침체에 맞춰 움직이는데, 러시아의 경우 경기는 추락하고 있지만, 러시아 정부의 개입으로 통화만 폭등하고 있다고 WSJ은 지적했다. 문제는 이러한 인위적인 개입으로 통화 가치가 급등한 것이 오히려 경제에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통화 가치 강세는 일반적으로 인플레이션을 완화하고 수입물가를 낮추는 효과를 가지지만 대러 제재 여파에 이러한 효과를 누릴 수 없는 상황이다. 이에 올해 1분기 러시아의 실질 가처분 소득은 전년 대비 1.2% 감소했고, 식량 가격은 전년 대비 20% 급등했다.
이에 러시아 중앙은행의 통화정책 기조도 냉탕과 온탕을 오가고 있다. 러시아 중앙은행은 루블 가치 회복을 이유로 연 11%로 3% 포인트 또다시 인하했다. 지난달 초와 말에 각각 3% 포인트씩 두 차례 내린 데 뒤이은 세 번째 인하 조치다. 러시아 중앙은행은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서방의 대러 제재로 경제 혼란이 발생하자 지난 2월 28일 기준금리를 종전 9.5%에서 20%로 파격 인상한 바 있다.
이런 가운데 서방 사회에 러시아의 사실상 유일한 무기인 에너지 협박도 머지않아 여의치 않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미국 헤지펀드 대부로 불리는 조지 소로스는 드라기 이탈리아 총리에 보낸 서한에서 "러시아의 가스 저장고가 7월이면 꽉 찬다"며 "러시아에 유럽은 유일한 시장으로 공급하지 않으면 시베리아의 가스전 1만2000개를 폐쇄해야 한다"고 말했다. 즉 러시아가 유럽과의 가스 협상에서 계속 우위에 있을 수만은 없는 상황이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