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경 지출구조조정으로 깎인 농식품 예산
정부가 제출한 36조여 원 규모의 추경안에 대해 오히려 야당이 나서 51조 원 규모로 늘리자고 했다. 야당은 코로나19 피해 소상공인 손실보상 소급 적용, 채무조정 출자 확대, 취약계층 추가 지원, 형평성 보완 등이 필요하다며, 초과세수가 53조 원으로 파악되었으니 국가채무 부담 없이 추경 규모의 확대가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열쇠를 맡겨놓은 국민들은 빚까지 내며 팍팍한 살림을 겨우 지탱하고 있는데, 나라살림을 해보라 맡긴 이들은 오히려 넉넉한 나라살림을 나눌 생각은 않고 건실해야 한다는 핑계로 곳간 자물쇠를 더욱 걸어 잠그고 있는 꼴이다. 야당의 원내대표는 여당이 더욱 나서 정부를 압박하고 설득해 두텁고 충분한 지원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민을 대표하여 응당 해야 할 말이지만, 여당일 때 왜 그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냐는 지적을 받을 수밖에 없다.
추경 규모와 국회 논쟁 행태를 언급하는 이유는 겉모습에 가려져 제대로 살펴보지 못하는 추경안 내용 때문이다. 추경은 애초 세운 올해 나라살림 예산에 추가로 보태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추경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기존 예산을 조정한다. 국회에 제출된 정부안을 보면 60조 원 규모의 추경 재원 마련을 위해 농림축산식품부 소관 재정 규모는 본예산보다 2132억 원이나 감소했다.
당면한 식량위기에 원자재, 물류비가 물가 상승으로 이어지고 있어 식품 가공원료 매입이나 밀가루 가격안정 지원, 비료 가격인상분 지원 분야 등 5개 사업은 2121억 원이 증액됐지만, 무려 58개 사업에서 4253억 원의 예산이 감액된 것이다. 이번 추경의 지출 구조조정 7조 원 중 6.1%에 달하고, 전체 예산에서 차지하는 농식품부 예산 비중은 2.8%에서 2.5%로 축소되었다.
정책 방향의 문제가 드러나는 것은 감액 내용인데, 농업재해보험, 재해대책비, 양곡관리비, 농업·농촌 물관리 관련 비용 등의 예산을 삭감한 것이다. 기후위기로 더욱 어려워지고 있는 농업 대응 예산 분야 사업들의 예산을 깎고 있는 것이다. 농업·농촌의 재생과 기후 대응 전환 예산들은 제대로 쓰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추경을 위해 삭감해도 괜찮다는 것이 정부의 설명이다. 새 정부의 식량주권 공약을 출범하자마자 내버리는 짓을 정부가 나서서 하고 있다.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농업·농촌의 전환 대응에 필요한 최소한의 예산마저 삭감하는 행태는 공분을 일으키는 일이다. 국회 추경 논의 과정에서 여론의 지적이 있었지만 최종안에 어떻게 반영되었는지는 결국 본회의 처리 이후에나 드러날 것으로 보인다.
새 정부의 농업·농촌에 대한 무관심과 무시가 벌써부터 두렵다. 무서워서가 아니라 무지와 무능으로 나라살림을, 우리 사회의 건강한 지속성을 무너뜨릴까 두렵다. 영화 ‘웰컴 투 동막골’ 촌장의 대사는 정치의 본질을 보여준다. ‘고함 한 번 지르지 않고 부락민들을 휘어잡을 수 있는 거…, 그 위대한 영도력의 비결이 뭐유?’, ‘뭐를 마이 맥여야지 뭐’. 고르게 나누는 것이 민생이고,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전망을 열어가는 것이 정치이다.
나라 곳간에 금은보화가 쌓이고, 온 나라가 스마트시티로 운영되어도, 시민들, 우리 인간은 여전히 건강한 먹거리를 나눠 먹어야 살 수 있다. 제 스스로 농사짓지 않고 충분한 먹거리를 누릴 수 있는 마을은, 나라는 없다. 당장은 금과 달러로 사다 먹으면 되는 것으로 생각하나, 이미 기후위기와 평화위기는 식량안보, 식량주권의 위기로 이어지는 시대를 살고 있다. 자급할 수 있는 역량을 높이고, 먹거리를 나눠 고르게 살아가는 사회라야 오래 갈 수 있다. 다음 세대를 생각하지 않는 사회는 결국 그 세대가 마지막 세대가 될 것이고, 자기 밥그릇만 챙기고 나누지 않는 정부는 그 나라의 마지막 정권이 될 것이다. 사회 구성원들의 밥그릇을 걷어차는 것은 정치와 관료들 스스로 자신의 밥그릇을 걷어차는 것이다. 내 밥그릇은 철밥통이라 괜찮다 생각한다면 어리석은 일이다. 여러번 걷어차이면 철밥통도 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