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틴에 대가 치르게” “인도주의적 고통 막자” 가치와 이익 사이 접점 찾기 ‘유럽의 고민’
지난달 중순 미국을 공식 방문한 이탈리아의 마리오 드라기 총리는 조 바이든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직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말했다. 당시는 전쟁이 시작된 지 두 달 반 정도가 지난 시점. 그때만 해도 이런 발언은 이상하게 들렸을 수 있다. 피 흘리며 싸우는 우크라이나인들을 보며 벌써부터 휴전이 필요하다고 공식 석상에서 발언했으니 말이다. 이제 전쟁이 세 달 반 정도 계속되면서 휴전의 필요성을 이야기하는 목소리가 점차 커진다.
獨·佛·伊 빅3 vs 英·폴란드·발트3국
지난달 28일 독일의 올라프 숄츠 총리와 프랑스의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 80분간 전화 회담을 가졌다. 푸틴은 유럽의 두 지도자에게 우크라이나에 공격용 무기를 제공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반면에 독일과 프랑스의 정상은 우크라이나와 직접 협상에 나설 것을 촉구했다. 독일과 프랑스는 유럽통합을 이끄는 핵심 국가이다. 영국이 유럽연합(EU)에서 탈퇴한 후 이탈리아도 EU 회원국 가운데 ‘주요 3개국’(빅스리)의 하나로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EU 27개 회원국 가운데 주요 3개국이 우크라이나에 휴전을 통한 평화협정의 체결을 조심스럽게 요구하고 나섰다. 대러시아 전쟁 지원을 주도해 온 미국은 아직 전쟁의 최종 목표를 밝히지 않는다.
반면 폴란드와 발트 3국, 영국 등은 대표적인 주전파이다. 이들은 푸틴이 반드시 이번 침략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2014년 3월 푸틴이 크림반도를 합병했을 때 미국과 EU는 경제제재에 그쳤다. 이런 미온적인 대응이 푸틴의 이번 침략을 야기했다고 본다. 따라서 주전파들은 우크라이나를 더 적극적으로 지원해 푸틴이 앞으로는 이런 오판을 하지 않게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이들의 입장에서 보면 전쟁은 더 오래 지속될 수밖에 없다.
어떤 조건으로 휴전을 하고 평화협정을 체결할 수 있나
독일과 프랑스, 이탈리아가 중심이 된 주화파와 위의 주전파는 언제 어떤 조건으로 휴전을 하고 이어 평화협정을 체결하냐는 것은 우크라이나가 결정할 일이라는 데 의견이 일치한다. 그러나 영토 회복과 관련해서는 입장 차이가 너무 크다.
주화파는 지극히 현실적인 입장을 취한다. 전쟁이 장기화할수록 인명 손실과 고통은 커진다. 러시아나 우크라이나가 이번 전쟁에서 결정적으로 승리를 거두기는 매우 어렵다. EU 27개국의 물가상승률은 평균 8%를 넘었다. 치솟는 원유와 가스 요금, 식량 가격 폭등으로 경제가 이만저만 어려운 게 아니다. EU 27개국은 최근 러시아산 원유의 해상 수입을 연말까지 금지하기로 합의했다. EU가 수입하는 러시아산 원유의 90% 정도가 여기에 포함된다. 지금도 러시아는 하루에 10억 달러(1조2300억여 원) 정도의 원유와 가스 수출 대금을 받고 있다. 러시아는 이 돈으로 전쟁을 지속할 수 있다. EU로서는 상당히 큰 경제적 손실을 감수하고서라도 원유 금지에 합의했다. 러시아에 빨리 우크라니아와의 휴전 협상에 나서라는 압박이 담겨 있다.
그럼에도 러시아나 우크라이나 모두 현재까지 휴전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우크라니아의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은 다만 “현재 상황에서 불필요한 손실 없이 침략 이전의 2월 24일 선까지 영토를 회복하는 게 우리에게는 승리이다. 러시아가 이 선까지 물러나면 평화 협상의 조건이 조성된다. 그렇지만 러시아는 이런 협상에 관심이 없다”고 밝혔다. 러시아는 지금까지 우크라이나 영토의 약 20% 정도를 정복한 것으로 추정된다. 대한민국의 영토보다 조금 넓다. 우크라이나 동부의 돈바스 지역과 흑해 일부 영토를 포함해서 러시아군이 큰 희생을 치르고 어렵게 점령한 영토를 다시 우크라이나에 돌려준다는 것은 현재로서는 가능성이 아주 낮다. 그렇기 때문에 전쟁은 더 오래 지속될 듯하다.
對러시아 전략 주도하는 미국은 무엇을 바라나
미국은 지금까지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대러시아 전략을 주도해왔다. 강력한 경제 및 금융 제재를 부과했고 약소국 우크라이나에 첨단 정보를 제공했다. 또 무기를 비롯해 540억 달러를 지원했다. 우크라이나가 강력하게 요구한 다연장로켓포를 제공하지 않았지만 사정 거리가 100km 이내인 중거리로켓포를 지원했다. 그러면서 미국은 우크라이나가 러시아 본토의 목표물을 향해 이 무기를 쏘지 않겠다고 확인했다고 밝혔다. 확전을 경계하면서도 우크라이나에 최대한의 무기를 지원해 유리한 전황을 이끌도록 하겠다는 게 미국의 방침이다. 로이드 오스틴 미 국방장관은 “우크라이나 침략과 같은 일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약화된 러시아를 보고 싶다”고 말했다.
미국은 독립된 주권국가로서의 우크라이나를 원한다고 밝혔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가입도 자율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그런 나라를 말한다. 반면 이번 전쟁의 최종 목표에 대해서는 아직도 애매모호하다. 즉 우크라이나의 영토 회복은 어느 수준까지이고 무슨 조건에서 평화협상을 맺을 수 있을지에 대해서 미국은 아직까지 명확한 입장을 내놓지 않는다. 일부에서는 미국이 일부러 이런 입장을 취한다고 보기도 한다. 미국의 지원 규모와 지원 무기 등에 따라 앞으로 우크라이나 전쟁의 지속 여부와 향배가 큰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러시아를 중국의 품에 안기는 게 유럽의 안보에 도움이 될까?
이런 논란 속에서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의 발언은 되새겨볼 만하다. 대표적인 대전략가로 국제정치의 큰 그림을 그리는 그는 “장기전에 따르는 고통을 끝내려면 우크라이나가 영토 포기를 고려해야 한다. 2월 24일 러시아 침략 이전의 영토 회복을 넘어서 전쟁을 계속하는 것은 우크라이나의 자유가 아니라 러시아에 대한 전쟁이다”라고 진단했다. 그는 또 “허약해진 러시아가 중국과 항구적인 동맹을 맺는 게 미국과 유럽이 바라는 것인가?”라고 질문했다. 이번 전쟁에서 러시아를 강하게 밀어붙여 아주 허약하게 만든다면 러시아는 더욱더 중국에 의존하게 될 것이라는 게 그의 전망이다.
1970년대 중반 닉슨 대통령 시절에 국무장관을 지낸 그는 당시 중국과의 관계를 개선해 소련을 견제하는 전략을 폈다. 그는 유럽안보에서 러시아의 역할을 인정해야 한다고 지속적으로 강조해왔다. 매우 현실적인 진단이지만 주전파는 이 발언을 강력하게 비판했다.
같은 맥락에서 프랑스의 마크롱 대통령도 유럽은 싫든 좋든 러시아와 함께 살아야 한다고 밝혔다. 미국은 원유와 가스를 자급한다. 이렇기에 미국은 전쟁 발발 직후 러시아산 원유와 가스 수입을 곧바로 금지했다. 러시아에 원유의 30%, 가스의 40% 정도를 의존해온 유럽은 상황이 매우 다르다. 침략자에 대가를 치르게 해야 한다는 원칙에는 공감하지만 경기침체가 지속되는데 물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오른다. 이런 상황에서 되도록 이른 시일 안에 휴전과 평화협정의 체결을 바라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EU 최대의 경제대국 독일은 EU 경제의 20%를 차지한다. 독일은 우크라이나 전쟁의 여파로 올해 경제성장률을 당초 3.6%에서 1.4%포인트나 하향 조정했다. 5월 물가상승률은 7.9%로 48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독일 경제의 성장 둔화로 EU 경제도 부정적인 영향을 받는다.
경제가 어려워지는데 언제까지…
외교는 가치와 국익의 적절한 접점을 찾는 일이다. 푸틴은 침략자이고 응당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 하지만 경제가 어려워지는데 마냥 언제까지 가치만을 붙잡고 있을 것인가? 여기에 유럽 각국의 고민이 담겨 있다. 전쟁이 더 오래 지속될수록 주화파와 주전파의 갈등은 표면에 더 드러날 듯하다.
팟캐스트 ‘안쌤의 유로톡’ 제작·진행자, ‘하룻밤에 읽는 영국사’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