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대표 5개 가상자산(암호화폐·코인) 거래소가 라이트코인의 상장 폐지(거래종료)를 결정했다. 코인을 투자한 지 얼마 안 된 이들에겐 그저 그런 알트코인 중 하나지만, 오랜 시간 투자를 한 ‘올드비(게임을 오랫동안 한 사람)’가 받아들이는 느낌은 사뭇 다르다. 나름 가상자산 시장의 새로운 역사를 썼던 코인이었기 때문이다. 시총 5위권엔 항상 있던 라이트코인은 어쩌다 상폐되는 굴욕을 맞게 됐을까.
국내 주요 코인거래소가 라이트코인을 상폐를 결정한 이유는 최근 진행한 업데이트 ‘밈블윔블(MWEB)’ 기능 때문이다.
이 기능은 거래자를 추적할 수 없도록 한 기술이다. 지난달 업비트는 라이트코인을 투자 유의 종목으로 지정하며 “거래 정보가 노출되지 않는 선택 기능이 포함된 업그레이드가 진행됐다”며 “이에 라이트코인(LTC)에 익명 전송 기술이 추가된 것으로 볼 소지가 있다고 판단한다”고 공지했다.
네트워크 업그레이드에 포함된 거래 정보가 노출되지 않는 선택 기능이 특정금융정보법령상 익명 전송 기술에 해당한다고 본 것이다.
빗썸, 코인원, 코빗, 고팍스 등 다른 거래소들의 상폐 이유도 대동소이하다.
사실 거래 상대 추적을 피할 수 있는 익명화 기능은 해외에선 문제시되지 않는다. 다른 나라 대부분의 거래소가 대시(DASH), 모네로(XMR), 지캐시(ZEC) 등 익명화 기능을 가진 이른바 ‘다크코인’의 거래를 지원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 정부는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강력한 코인 자금세탁방지를 천명했다. 국내 시장이 전 세계 코인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란 점에서 라이트코인에겐 뼈아픈 결과다.
비트코인이 ‘디지털 골드(디지털화된 금)’라고 불렸다면, 라이트코인은 ‘디지털실버(디지털화된 은)’라는 별칭이 생길 정도로 인기가 많은 코인이었다. 비트코인을 하드포크(코드복사)해 나온 최초의 코인이었고, 출시일이 2011년 10월일 정도로 오래된 코인이기도 하다.
잘 나가던 라이트코인은 왜 익명화 기능을 추가한 것일까. 라이트코인은 2019년 10월 22일 밈블윔블 기능 도입을 발표했는데, 이 시기는 코인 암흑기의 한 가운데였다.
당시 라이트코인은 최초의 비트코인 포크 코인이란 수식어를 빼면 다른 매력은 크지 않았다. 예컨대 비트코인이 디지털 자산의 개념을 확고히 했고, 이더리움과 이오스(EOS), 카르다노(에이다) 등은 블록체인 플랫폼을 강점으로 내세웠다. 비트코인보다 조금 빠르긴 하지만 라이트코인의 위치가 애매했던 셈이다.
이 때문에 라이트코인 재단은 익명화 기능을 얹어 외연 확장을 꾀했다.
라이트코인 개발자들이 이 기능을 개발하는 사이 시장은 너무 많이 변했다. 잠깐 가지고 놀다 버리는 성인들의 장난감 정도로 지켜봤던 각국 정부가 갈수록 성장하는 시장을 보고 규제의 칼날을 빼 들었기 때문이다. 우리 금융당국이 처음 손을 뻗친 곳이 익명화 코인이었다. 기술의 좋고 나쁨을 떠나 라이트코인 재단의 선택은 국내 시장의 흐름에 역행했다.
라이트코인의 창시자 찰리 리는 비트코인은 금처럼 큰 거래에 사용하고, 라이트코인은 은처럼 작은 거래에 사용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이 콘셉트는 투자자들을 불러모았고, 2017년 12월 최고 360달러까지 치솟았다. 지난해엔 410달러 최고점을 경신했지만, 꾸준히 하향세다.
찰리 리는 사상 최고점에 보유 코인을 전량 매도해 투자자들의 원망을 산 사건은 유명하다. 그는 2017년 12월 20일 당시 코인 가격이 가장 높았던 시기에 자신이 가지고 있던 라이트코인을 모두 팔았다고 밝혔다. 찰리 리는 CNBC와 인터뷰에서 라이트코인을 전부 팔았던 이유에 대해 “이해관계에 상충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설득력은 떨어진다. 주식에서나 코인에서나 대주주와 창업자가 가진 지분을 모두 판 것은 시장에 미래 성장성을 비관한다는 신호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비트코인 창시자인 사토시 나카모토도 초기 채굴 코인을 그대로 가지고 있고, 비탈릭 부테린 이더리움 창시자도 대부분의 보유 코인을 아직도 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