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금융당국과 정부가 물가 대응에 실패하면서 세계경제에 후폭풍이 몰아치고 있다. 미국 당국자들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팬데믹(전염병 대유행)이라는 새 위기와 싸우면서 과거 플레이북을 전술로 활용하다가 낭패를 봤다는 분석이 나온다.
최근 미 행정부와 연방준비제도(Fed·연준) 관리들이 상황을 오판했다며 공개적인 반성을 하고 있다. 제롬 파월 연준 의장은 지난달 인터뷰에서 “돌이켜보면 금리를 더 일찍 올리는 게 나았다”고 고백했다. 재닛 옐런 미 재무장관도 인플레이션이 일시적일 것이라고 확언했던 게 실수였다고 이달 초 고해성사에 나섰다. 미국 경제 정책의 양대 수장인 재무장관과 연준 의장이 잇따라 자신들의 판단 오류를 인정한 것으로, 대단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들은 뭘 잘못 판단한 걸까.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미국 연준과 행정부가 2007~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남긴 후유증이 팬데믹 국면에서 재연될 가능성을 극도로 우려했다고 지적했다.
약 10년 전 글로벌 금융위기를 겪은 후 경제는 약한 수요, 성장 정체, 고실업과 저물가의 장기화 늪에 빠졌다. 10%에 달했던 실업률이 5%로 떨어지는 데 6년이 걸렸고, 물가는 10년이 넘도록 연준 목표치인 2%를 밑돌았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오래 지속된 저성장에 데인 미국 경제 수장들은 팬데믹 시기, 과감하게 확장 정책을 펼쳤다.
코로나 발생 초기 도널드 트럼프 당시 미국 대통령은 3조 달러가 넘는 긴급예산법에 서명했다. 의회는 초당적으로 법안을 통과시켰다. 연준은 금융위기 당시 써먹었던 전략을 꺼내들었다. 단기 금리를 제로로 떨어뜨렸고 장기 금리를 낮추기 위해 채권을 매입하기 시작했다. 바통을 이어받은 조 바이든 행정부도 1조9000억달러에 달하는 슈퍼 경기부양안을 준비했다. 옐런 재무장관은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긴축 정책 탓에 경기확장이 지연됐다며 바이든 정부의 부양책에 힘을 실었다. 옐런은 “적게 행동해서 오는 리스크가 많이 하는 것보다 크다”며 “할 수 있는 최선은 크게 행동하는 것”이라고 정부를 다독였다.
문제는 미 경제 수장들이 2010년대 글로벌 금융위기에 따른 저성장을 머릿속에 떠올리면서 코로나 시기 대응에 과거 ‘플레이북’을 적용했다는 점이다.
금융위기와 팬데믹은 모두 경제위기였지만 근본은 달랐다. 금융위기가 기업과 개인들의 수요를 위축시킨 반면 팬데믹은 공급 요인을 타격했다. 원자재, 컨테이너선, 반도체 등 다양한 상품과 서비스의 글로벌 공급에 차질을 빚은 것이다. 공급이 더디게 회복되는 동안 수요는 빠른 회복세를 보였다. 경기부양책 없이도 살아났을 수요가 막대한 유동성에 힘입어 폭발적으로 늘면서 가격 상승을 압박했다.
금융위기 이후 개인, 기업, 정부의 총 지출은 이전 추세를 여전히 밑돌았지만 올 1분기 지출은 부양책에 힘입어 팬데믹 이전 수준을 넘어섰다.
진행 양상도 금융위기와 확연히 달랐다. 팬데믹 초기 셧다운 여파로 14.7%까지 치솟았던 실업률은 2020년 12월 6.7%로 떨어졌다. 예상보다 빠르게 실업률이 감소했고 반면 인플레이션은 들썩였다.
상황이 변하고 있는 데도 파이터들은 과거에 매여 있었다. 파월 의장은 작년 2월 연설에서 “이전 경험의 교훈은 경제 충격에서 회복되는 데 수년이 걸린다는 점”이라고 저성장 우려를 되풀이했다. 파월 지지를 배경으로 정부는 경기부양책에 가속을 밟았다.
정치권도 과거에 매여있기는 매한가지였다. 민주당은 이번 기회를 그동안 추구해왔던 사회 프로그램을 확대하는 계기로 삼고 싶어했다. 과거 공화당이 재정 적자를 줄이기 위해 버락 오바마 행정부를 압박, 긴축 재정을 수용하도록 한 것을 벼르고 있던 참이었다. 일부 진보 의원들은 과도한 인플레이션만 없다면 경기 부양을 위해 화폐를 마음껏 발행해도 된다는 ‘현대통화이론’을 꺼내들었다.
로런스 서머스 미국 전 재무장관을 비롯한 전문가들은 이 같은 확장 정책에 경고를 쏟아냈다. 서머스 전 장관은 “연준의 책무는 파티가 과도하게 흥청망청해지기 전에 펀치 볼을 치우는 것”이라며 “(지금 연준은) 술 취한 사람들이 비틀거릴 때까지 기다리고 있다”고 비판했다.
잇단 경고음에도 연준을 비롯한 경제 수장들이 과거에 얽매여 상황을 오판한 탓에 5월 미국 물가는 8.6% 뛰며 최악의 성적을 받아들었다. 41년래 최고치로 치솟은 물가를 잡기 위해 연준은 1994년 이후 잠자고 있던 '자이언트 스텝(금리를 한 번에 0.75%포인트 인상)'을 깨울 것으로 전망된다.
정책 책임자들이 금융위기 이후 긴축의 교훈에 과도하게 심취한 탓에 글로벌 경제는 인플레이션, 자산시장 붕괴, 경기침체, 부채 급등 등 복합적 위기 소용돌이에 빠져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