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ASML 본사 찾아 EUV 장비 수급 총력
반도체 초격차 확보하고 ‘450조’ 투자 계획 구체화
유럽 현지 파트너사 협업 강화로 ‘전장사업’ 몸집↑
12일간의 유럽 출장을 마치고 18일 귀국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기술’을 강조했다. 공급망 차질, 글로벌 금융 불안, 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 등 복합 위기를 극복할 해법을 기술력에서 찾겠다는 의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날 오전 9시 40분께 서울김포비즈니스항공센터(SGBAC)에 도착한 이 부회장은 인재 확보, 조직 문화의 중요성도 언급했다. 이 부회장은 “유럽에 가니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이 훨씬 더 느껴졌다”면서 “시장의 여러 가지 혼동과 변화, 불확실성이 많은데 저희가 할 일은 좋은 사람을 모셔오고 조직이 그런 예측할 수 있는 변화에 적응할 수 있도록 유연한 문화를 만드는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12월 중동에 이어 6개월 만에 해외 출장을 간 이 부회장은 헝가리, 독일, 네덜란드, 벨기에, 프랑스 등 각국을 오가며 숨 가쁜 일정을 소화했다. 유럽에서 더욱 격화한 기술 경쟁 상황을 직접 느끼고 돌아온 이 부회장이 앞으로 반도체 초격차 유지 등 산적한 현안 해결을 위해 기술력과 인재 확보에 주력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제일 중요했던 것은 네덜란드 ASML과 벨기에 아이멕(imec) 반도체 연구소에 가서 차세대, 차차세대 반도체 기술이 어떻게 되는지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부회장은 이번 출장에서 네덜란드 방문을 가장 중요한 일정으로 꼽았다. 메모리반도체 분야에서 삼성전자가 부동의 1위이지만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시스템반도체 시장에서는 경쟁력이 부족한 현실을 염두에 둔 행보였기 때문이다.
이 부회장이 네덜란드를 콕 찍어 언급한 것을 보더라도 삼성전자가 비메모리반도체(파운드리ㆍ시스템반도체) 분야에서 가야 할 길이 얼마나 험난한지 보여준다. 파운드리 1위인 대만 TSMC와의 점유율 경쟁, 인텔의 진출 등 치열한 경쟁에서 왕좌를 차지하기 위해선 최신 극자외선(EUV) 노광장비의 안정적인 수급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 부회장은 피터 베닝크 최고경영자(CEO)를 만나 ASML의 최신장비인 ‘하이-뉴메리컬어퍼처(High NA) EUV’를 살폈다. 하이NA EUV의 가격은 대당 5000억 원으로 더 세밀한 회로 작업이 가능해 초미세 공정(나노) 경쟁에서 필수적인 장비로 여겨진다. 오는 2024년 출시 예정인 초기 물량 5대를 인텔이 1.8나노 공정을 위해 ASML로부터 독점 공급받기로 한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전자는 인텔보다 늦은 시점인 2025년 해당 장비를 확보할 수 있는 데다 물량도 TSMC와 나눠야 하는 만큼 녹록지 않은 상황이다. 업계는 이 부회장이 직접 마르크 뤼터 네덜란드 총리와 베닝크 CEO를 만나 EUV 장비 확보 등 사활을 건 협력 강화 방안을 논의했을 것으로 평가했다.
“몸은 피곤했지만 헝가리에 있는 삼성SDI 배터리 공장과 하만 카돈을 방문하고 BMW 등 고객사도 만났다. 이번 방문을 통해 급변하는 자동차 업계를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이 부회장이 이번 출장에서 반도체 만큼이나 공을 들인 분야는 자동차 전장이다. 이날 이 부회장이 현지 공장 방문과 고객사와의 만남을 직접 언급한 것은 배터리와 차량용 반도체 등에서 의미 있는 성과가 있을 것이라는 점을 내비친 것으로 풀이된다.
앞서 이 부회장은 유럽 출장 첫날 헝가리에 있는 삼성SDI 배터리 공장을 방문한 뒤 독일을 찾아 자동차, 반도체 분야 기업들과 사업 방안을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부회장은 최윤호 삼성SDI 사장 등 경영진과 BMW 등 전기차 배터리 고객사와의 추가 협력을 끌어냈을 것으로 관측된다.
지난달 삼성SDI가 세계 4대 완성차 업체인 미국의 스텔란티스에 이어 유럽 완성차 업체와 합작법인(JVㆍ조인트벤처)을 설립을 논의했을 가능성도 점쳐진다. 독일의 차량용 반도체 기업인 인피니온 인수 가능성도 거론된다.
이 부회장의 하만 카돈 방문도 전장 사업에 힘을 싣겠다는 표현으로 읽힌다. 하만은 디지털콕핏(오디오, 비디오, 내비게이션 등을 디지털 계기판으로 통합한 형태의 차량 조종석), 카오디오, 텔레매틱스(차량용 무선네트워크) 등 전장 관련한 사업을 하고 있다. 올해 초에는 AR(증강현실) 기술 기업인 아포스테라를 인수하며 사업 역량을 확대했다.
업계는 이 부회장의 이번 출장이 이달 초 삼성전자가 발표한 5년간 450조 원의 대규모 투자계획에 이은 첫 글로벌 현장 경영이라는 점을 주목했다. 이 부회장은 반도체, AI(인공지능), 로봇, 바이오 등 첨단 산업을 기초로 ‘뉴삼성’의 고삐를 죄고 있다. 업계에선 무엇보다 반도체 부문에서 뉴삼성을 향한 디딤돌 중 하나로 대형 인수ㆍ합병(M&A)이 이뤄질 것이란 전망을 꾸준히 나오고 있다.
이날 이 부회장은 M&A 행보에 대해 구체적인 내용은 언급하지 않았다. 다만 일각에선 이 부회장이 생존을 건 치열한 경쟁 분위기를 체감하고 온 만큼 향후 삼성의 버팀목이 될 중요한 결정에 속도를 낼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업계 관계자는 “이 부회장이 이번 출장에서 삼성의 미래 먹거리로 여겨지는 여러 분야의 현주소를 점검하고, 고객사들과 파트너십 강화에 나서면서 긍정적인 결과가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며 “앞으로의 경영 계획을 더욱 구체화했을 것”이라고 말했다.